이런 적도 있었다. 편부모 가정의 경우 급식과 우유가 무료지원이 되었다. 애들은 돈 내고 먹어야 했지만, 나는 정부 찬스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찬스를 거부했다. 저들 알아서 누가, 누가 편부모 가정인지 확인하여 착착착 프로세스를 밟았다면, 아마 공짜로 받아먹었을지 모른다. 개뿔, 정부 찬스를 사용하려면 교무실에 수시로 불려가야 하고, 뭐 적어내야 하고, 바스락거리는 교복 소리가 거슬려 눈치 보며 손들어야 하는 치열한 과정이 남아 있었다. 그럴 바엔 제 돈 주고 먹고 말지. 단 돈 몇 만 원이 소중했을 엄마에겐 미안했지만, 편부모 가정 자녀에 대한 배려 없는 절차에 내가 그 찬스를 걷어찼다. 그리고 더 씩씩하게 다녔다. 아빠를 일찍 여읜 게 우리 가족의 죄는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없다는 이유로 고개 숙이거나 기가 죽거나 뒤로 물러서서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전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더 크게 웃었고, 친구들과 더 잘 어울렸고, 학원도 다녀봤고 여느 소녀와 다름없이 그저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건 해보며 살았던 것 같다. 서른 한 살의 내가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동정이 싫었던 마음은 내가 만든 자격지심이었을지 모르겠다. 에잇, 아깝다. 정부 찬스 좀 써먹을걸. 보내주시는 동정, 조금 즐겨볼걸.
--- p.31~32
나는 우리 가족에게 말한다.
“제발, 행복하게 살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본인 삶을 중심에 두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 아니, 부디 행복해줘! 행복해!”
우리는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엄마 아빠는 경기도 파주에서, 우리 둘은 서울에서. 한 번씩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확인 차 모인다. 모임의 때는 주로 명절로, 그날은 파티다.
파주에서 전원생활을 하시는 부모님 댁 거실에서 파티는 시작된다. 우선 주워 모아둔 신문으로 거실 바닥을 도배한다. 착착착착. 그 위에 휴대용 버너와 철판을 올리고, 아빠 자리에 투뿔 한우를 부위별로 대기시켜둔다. 먹는 순서는 고기 굽기 장인, 아빠의 마음이다. 일사천리로 반찬을 가져다 나른다. 파티의 묘미는 역시 소맥이지. 김치냉장고에 쟁여 두었던 소주와 맥주를 가져 오며 파티의 세팅은 마무리된다.
“우리 가족, 건강하자! 짠!”
소맥 두어 잔에 기분이 절로 나니, 노래가 빠질 수 없지. 요즘 인터넷 TV는 어찌나 잘 되어 있는지, 노래방 따로 갈 필요가 없다. 온 식구 일어나 춤추며 노래한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아, 엄마 이제 그만해. 좀 쉬자.”
시골의 밤을 불태웠다. 어슬렁거리던 메오도 지쳤는지, 자기 자리에 가서 눕는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 메오 모두가 있는, 참으로 행복한 밤이다.
--- p.99~100
많은 경험과 더불어 흐르는 시간에, 나이를 가리키는 숫자 앞자리가 1일에서 2로 바뀔 때는 마냥 신났다.
‘오예 20대! 드디어 어른!’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뀔 땐 좀 달랐다.
‘음, 이제 나도 30대가 되었군. 그런 거군.’
30살까지는 30대가 되었다는 사실만 받아들이고 넘어갔다. 그렇게 어버버하다 1년 꼴깍 지나 31살. 내년에 32살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헉’스럽다.
주변에 오빠, 언니라고 부를 사람보다 누나, 언니라고 부르는 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회생활하며 늘 막내였는데, 늘 챙김 받기만 했는데. 내가 챙기는 입장이 되었다니.
아무리 나이에 얽매이지 않으려 해도, 나를 칭하는 주변 상황들에 왠지 나잇값을 해야 할 것만 같다.
한 해 한 해 갖는 의미가 다른 나이, 31살.
이런 걸 보면 31년은 절대 짧지 않은 세월인가 싶다.
‘기껏해야 31년 살아 놓고 무슨.’ 이라며 콧방귀를 끼어줄 선배님들이 계신다면, 오히려 감사할 거 같다. 생각의 전환을 하게 해주셨으니.
“맞다. 나 아직 31살 밖에 안 살았는데 뭐, 아직 아기네. 피식.”
그나저나 모든 인생은 길이와 깊이에 관계없이 귀하다는 것은, 진리다.
--- p.145~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