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의 순간, 거절·거부하지 않아 상호 동의한 것처럼 보였어도, 혹은 행위자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때로는 그 맥락이 의도된 설계라고 할지라도, 더 나아가 ‘해害’를 당한 사람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언동을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권력을 밝혀야 한다. ‘해害’가 무엇이며, 왜 문제인지 ‘해害’를 만드는 권력·시스템·구조를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성희롱 등의 성범죄는 언제든지 주조되며 피해자의 고통은 치유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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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굴욕감 등의 피해자 감정을 강조하다 보니 성희롱은 누가 봐도 부적절한, 굴욕적이고 혐오감을 주는 성적 언동을 규제하는 제도가 되어 버렸다. 아니 의도하지 않게 부적절함을 제기하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현행 성희롱 관련법은 성적 언동에 관한 어떠한 규범을 제시한다. 성차별이나 노동권 침해의 구조를 변화하기보다 직장 내 성적 언동만 규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감정에 의하기보다 강자가 약자에게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이쁘다나 어깨 두드림은 일단 지양하는 것이 좋다. 부하가 사장에게 이쁘다거나 어깨를 두들릴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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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 화재가 나면 사람들은 어디를 가리고 나올 것인가’란 농담에 대한 여성의 답은 얼굴이다. 남성은 성기를 가리거나 아무데도 가리지 않고 나온다고 답한다. 이처럼 부끄럽다고 여기는 성적 부위는 성별, 연령, 상황 등에 따라 다르다. 부끄럽다고 인식하는 성기가 마음먹기에 따라 사랑하는 연인에게 혹은 산부인과 의사에게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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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 고위직 성희롱 방지 교육 이후 한 대표가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앞으로 여성들을 정말 조심해야겠어요. 출장도 조심하고. 아무래도 술자리 회식은 안 하는 게 상책이겠죠? 여자들도 집에 빨리 가는 것을 좋아하니 서로 잘된 일이죠.’ 이러한 의견은 여성 배려인가? 아니면 여성 배제인가? 바로 이 러한 언동이 성희롱이다. 여성 ‘배려’를 가장한 여성 ‘배제’를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이 성희롱을 가능하게 한다.
열심히 강의한다고 했지만 당시 필자의 강의는 실패였다. 왜 실패했을까? 성희롱 방지 교육을 받은 그 대표는 왜 여성 배제를 생각했을까? 여성은 정말 피해야 하는 요물인가? 아니면 즐겁게 놀다 버릴 수 있는 대상인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너무 자연스럽게 자신이 변화할 생각보다 남 탓을 한다. 난 아직도 그 대표의 진지한 표정과 대화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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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피해자들은 자신이 경험한 성적 언동은 기억하나, 불쾌한 그 언동의 원인이나 맥락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 단지 억울함만 기억했다. 또 자신이 왜 그 대상이 되었는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 당시 저항하지 못했는지를 말하기에만 집중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보다 자신의 고통이 더 크기 때문이다. 횡설수설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필자도 결국 필자가 아는 피해자들의 이야기 선에서 질문하고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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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업에서 ‘부사장과 여직원이 사귄다’는 성적 소문이 났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기업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비밀이 돼 버렸다. 이러한 소문이 어디서 기인했고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조사하는 것보다 성적 소문이 무엇이고 성적 소문 유포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성적 소문 당사자의 일할 수 없는 환경은 다른 직원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 또 성적 소문이 유포되어 누구를 즐겁게 했는지 왜 그러한 종류의 소문이 유포되는지, 그 구조를 살펴야 한다.
--- p.140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는 자는 공감하면서도 맥락적으로 들어야 한다. 피해자를 분석하거나 평가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의 맥락을 들으라는 것은 피해자와 관계자의 관계, 행위 양태, 그 상황 등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해害’를, 혹은 ‘해害’의 가능성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피해자의 말이 곧 진실이라는 것이 아니기에 성차별적 감수성을 갖고 ‘해害’를 상상해 봐도 좋다. 어떤 상황이 불편했다면 어느 정도로, 왜 불편한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왜 진정하게 되었는지 그 고통의 내용과 구조를 찾으라는 것이다.
--- p.175
여성과 남성이 유별한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특정 지위나 권력을 가지면, 성적으로 그렇게 해도 된다는 ‘그냥 그대로’의 습관이 (비)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가해지거나 상대방을 함부로 하는 폭력이 성희롱이다. 그래서인지 행위자는 자신의 잘못된 성적 언동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왜 그것이 잘못인지 깨닫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그렇기에 사과도 힘들고 어쩔 줄 몰라 한다.
---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