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투와 함께 살면서 처음으로 사람이 아닌 동물에 관심이 생겼어요. 투투와 오랜 시간 생활하다 보니 그동안 얼마나 동물의 감정과 생각, 습관, 행동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는지 깨닫게 되더군요. 저는 강아지 얼굴에 표정이 있다는 것을, 강아지들이 눈과 작은 행동으로 자신의 뜻과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아지도 매 끼니 같은 음식만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아지에게도 친구가 필요하고 가족이 필요하고 잦은 산책과 외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하나씩 배워갔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대체 강아지인 투투와 사람인 나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일까?’ ‘투투에게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이 있다면 길고양이들에게도,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들에게도, 사람의 ‘행복한 식탁’을 위해 죽는 닭, 소, 돼지 같은 동물에게도, ‘대가리 떨어뜨리기 게임’으로 죽어간 잠자리들에게도 희로애락이 있지 않을까?’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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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를 설명하고, 이데올로기의 효과에 관한 라레인의 설명을 덧붙였는데요, 이 문장들을 재구성하여 육식주의 이데올로기를 정의하고 육식주의 이데올로기의 효과 3가지를 요약해보았습니다.
"육식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이라는 두 개의 계급 사이의 관계를 감춤으로써 지배 계급으로서의 인간동물의 이익을 사회 구성원의 공통 이익으로 표상시키고, 또한 그 계급의 이념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육식주의 이데올로기의 효과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육식주의 이데올로기는 “육식은 자연스럽다” 등 특정 사상이나 신념을 ‘사실’로 표방하면서 ‘사실’을 왜곡한다. 둘째, 육식주의 이데올로기는 인지적인 차원의 문제를 포함한 규범을 생산한다. 셋째, 육식주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이고 가변적인 속성을 가진 사회적 산물을 자연적이고 영구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는 상징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 p.82
동물에 대한 이중 인식을 각성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은, 동정심이나 감정이입 등 심리적이고 정서적 자극을 동반하면서, 인간동물로 하여금 죄책감과 같은 감정적인 부조화를 경험하게 합니다.
감정적 부조화를 경험하게 되는 이 과정은, 명확하지 않거나 혹은 정리하지 못한 모호한 윤리적 영역으로 볼 수 있는데요. 철학자 스트라찬 도넬리(Strachan Donnelley)는 이 영역을 일컬어 “괴로운 중간지대”(the troubled middle)라고 표현합니다.
감정이입은 인간동물로 하여금 비인간동물의 감정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돕고 나아가 공감의 대상을 확장시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합니다.
--- p.107
“예전에는 고통받는 동물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걔는 동물이잖아, 걔는 닭이잖아, 그래봤자 동물의 고통이잖아,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지’ 하고 합리화, 정당화를 했어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이죠. 불편한 마음도 들지만 중요한 문제로 부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닭이든 햄스터든 물고기든 그 어떤 동물이든 이제는 개별적으로 보게 돼요. 동물 고유의 습성에 관심을 두고, 동물의 특정 부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어요. 소는 내게 우유를 주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돼지는 내게 껍데기를 주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양은 내게 털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닭은 내게 달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A(35세, 심리상담가, 채식 4년)
--- p.109
고민하고 갈등한다는 것은 곧 또 다른 변화, 선택의 가능성을 의미하지요. 마치 육식을 하고 모피를 걸치는 것에 어떠한 문제의식도, 두려움도 없던 이들이 이러저러한 계기와 기회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비인간동물 학대와 착취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비인간동물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의 무게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의식적으로 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가 어떻게 그토록 오래 회피하고, 묵인하고, 동조하고, 침묵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답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p.128
모두가 피해자인 것 같아요. 채식을 하는 사람들도 유별난 사람들 취급받고, 육식주의의 문제가 뭔지 고민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들도 안 됐고. 과거의 나를 포함해서, 육식주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하게 세뇌당한 마비 상태의 사람들에게는 회피나 정당화라는 낱말조차 끼어들 틈이 없어요. 무지 자체거든요. 무지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중심주의에 절어 있는 상태예요.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인간이 있다는 식의 파편화된 정보에 기초해 임의대로 동물의 종을 나누고, 위계를 만들고, 서열을 매기는 등의 무지한 행위가 이어지죠. 그런 엄청난 위계를 만들고는 이동물들은 귀엽다며 난리 치고, 저 동물들은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무서운 사고를 하는 거죠. 이런 과정에 무슨 내적 갈등이 있겠어요? 무지 그 자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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