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주의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와 문화 어디에나 존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머리 여럿 달린 괴물이다. 이는 하나의 신념 체계로, 남녀의 신체적 차이가 너무나도 확연해서 성별에 따라 모든 사회적·경제적 역할이 결정된다는 가정에 기반해 있다. 성차별주의는 성별이 재생산 기능뿐 아니라 개인의 인생,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 국가 및 공적 기구와 맺는 관계, 그리고 사회적 관계 전반을 결정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미묘한 몸짓과 언어에서부터 착취와 억압을 만들어내는 모든 행동, 가족 및 다국적 기업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제도에 나타난다. 성차별주의는 전쟁 체제만큼이나 복합적이고 구석구석 스며 있는 신념 체계이다. 극소수의 인간만이 전쟁 체제와 성차별주의라는 사회적 조건을 초월했을 뿐, 이를 벗어난 인간은 거의 없다.
--- p.51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봐야 할 두 가지 사안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충동을 금지시키는 반면 남성에게는 마음껏 공격성을 펼치도록 허락해준다는 것, 그리고 여성 사이의 경쟁 관계는 좌절시키는 반면 남성에게는 폭력을 써서라도 성공할 수만 있다면 경쟁해보라고 독려한다는 것이다. 물론 남성을 “차지하고” 남성에게 “매달리도록” 여성 사이의 경쟁을 독려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여성에게는 분노를 억눌러야 한다고 하지만, 남성에게는 분노를 행사하고 표출하는 것 또한 허용된다. 남성성과 남성 정체성의 발현으로서의 폭력을 독려하고, 심지어 승인해주는 행동들은 우리 사회의 에토스 전반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폭력은 “위대한 자질”로 칭찬받을 만하며, 심지어 미덕을 지닌 공적 행동이라고 여겨졌다.
--- p.56~57
내가 이 책에서 전하려는 페미니즘의 개념은, 여성에게 대단한 감수성의 내재적 역량이 있다거나 여성이 더 도덕적 행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적 특성이 남성적 특성보다 더 인간적이거나 인도주의적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은 억압의 반대항으로 인식되는 광의의 인본주의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성차별주의의 모든 형식과 그 발현된 모습에 반대하고, 그것을 해소하려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여성을 인간 활동의 전 영역에 완전하고 공정하게 통합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신념 체계이다. 더불어 그러한 통합은 전쟁 체제를 해소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라는 믿음 역시 품고 있다.
--- p.69
세계질서의 가치 중 하나인 평화는, 일반적으로 평화 연구에서는 부정의 의미, 즉 전쟁의 부재로 정의되곤 한다. 그렇게 정의할 경우, 평화의 가치에 대항하며 작동하는 주요한 힘은 군비경쟁이다. 군비경쟁 가운데서도 핵 군비경쟁은 성차별주의와 군사주의의 연관성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 p.86
강간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개인 혹은 개인들을 위협하거나 힘과 폭력을 사용해서 그들을 복종시키고 순종하게 강요하는 것이다. 적과 피지배국 시민들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성폭력 사이의 관계는 서로 견주어볼 만하다. 이 관계는 전쟁 체제와 성차별주의 모두 생존을 위해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여성들이 성차별적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어떤 체제도 영속될 수 없다. 전쟁 체제와 성차별주의는 둘 다 대개의 인간이 물리적 생존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 p.97
국민국가는 자국 국민에게 국가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에 대한 폭력을 수용하도록 격려하지만, 그 경계 내부에 있는 이들에 대한 폭력은 금지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성은 자기가 책임져야 할 여성은 보호하고 아끼지만, 그 외의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도록 학습받는다. 이러한 심리적 길들이기로 여성은 취약해지면서 남성에게 의존하게 된다. 게다가 그런 길들이기 때문에 남성은 인간 집단 전체를 더욱 손쉽게 대상화하게 되고, 따라서 그들에 대한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도 훨씬 덜 어려워하게 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여성은 남성보다 평화에 대한 염려와 전쟁에 대한 공포를 드러낼 확률이 훨씬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여성의 호르몬 체계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여성이 인간과 개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도록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 p.119~120
우리 안의 타자를 인정하는 것은 원초적 상처를 치유하고 공존하는 인간화 과정을 마련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것이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명령이 품은 메시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진정 공포를 불러오는 이가 우리 내부에 있다면, 그 모든 복잡성과 약함을 지닌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의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측면 모두를 사랑하는 치유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적(타자)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확대의 행위는 성차별주의를 넘어서고, 상존하는 강간의 가능성에서 여성을 해방시킨다. 또한 전쟁 체제에 속박된 상태로부터, 핵무기 경쟁이 초래한 멸절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데 필요한 근본적 요건이다.
--- p.136
개별 인간의 발전은 순환적이며, 때로는 나아가지 못한 채 물러서기도 한다. 페미니즘적 이행의 시각 또한 일보씩 내딛는 선형적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유기적이고, 흐르고, 소용돌이치는 변화의 개념이다. 여성들이 실패에 좌절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삶과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은, 그 반복되는 회귀에 대한 기대와 이해에 더해진 유기적 변화라는 개념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단선적인 단계별 이행 개념은 깊은 실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군사주의의 부정적 영향이 커지고 그 속도가 빨라질수록 수많은 이들을 집어삼키는 절망으로 귀착될 가능성이 크다.
--- p.191~192
만약 우리가 군비 철폐를 통해 진정 비폭력적인 세계로, 참된 평화와 정의로 나아가려 한다면,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타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안의 타자는 우리의 남성적 속성일 수도 있고, 여성적 속성일 수도 있다. 혹은 우리가 적과 범죄자에게, 혹은 영웅과 성자에게 투사해온 특성이자 성격일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만인에 대한 평등의 가치와 존엄성을 옹호한다면, 그들의 재능과 능력은 물론이고 단점도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동기부여가 될 것인지 여부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동기부여가 주로 교육, 특히 평화 교육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남성 우월주의의 토대에서나, 참호로 둘러싸인 군사주의 사회 체제에서는 변화를 불러일으킬 동기부여의 증거를 거의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면, 전쟁 체제의 덫에서 빠져나갈 희망 역시 거의 없다. 교육은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에 기초한 사업이다.
--- p.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