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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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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148*210*30mm
ISBN13 9788984815711
ISBN10 898481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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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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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나는 종말론과 관련해서 두 가지 의견, 즉 믿음과 희망과 기도에 관한 전체 교회 전승과 관련된 중요한 주제들,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전개된 주제들과 논쟁을 했다. 첫 번째 주제와 관련해서는 종말론을 그 어떤 유형이든 정치 신학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이런 까닭에 나는 근본적으로 문제의 범위를 제한해도 되겠다고 생각했고, 하느님 활동에 대한 희망의 의미를 역사에서 끌어내고자 시도했다. 하느님 활동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 내적 연관성을 제공하고, 덧없는 것을 불변하는 것으로 들어 올린다.
개정판 서문, 18쪽

여러 세기 동안 ‘최후의 사건들에 대한 교의’라는 이유로 신학의 끝머리에 자리하여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종말론은 오늘날 역사적 위기 속에서 신학적 사유의 중심부로 그 자리가 옮겨졌다.
약 20년 전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는 종말론을 우리 시대의 신학 중에서 ‘태풍의 중심Wetterwinkel’으로 보았다. 독일 교구들은 그들의 시노드에서 신앙 고백문을 ‘우리의 희망’이라는 제목 아래 두었다. 이처럼 곧 신앙을 ‘희망’이라는 전망에서 해석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오늘날 종말론은 신학의 집주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으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1장 문제 제기, 28쪽

예수가 전하는 복음은 온전히 종말론적이다. 또한 그 소식이 전하는 힘의 원천은 다름 아닌 예수가 권능을 가지고 세상의 종말을,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는 것에 있다. 예수의 폭발적이며 새롭고 거대한 힘의 무게는 바로 이러한 기대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전한 모든 말씀은 이 중심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 중심의 그리스도인 실존은 ‘주님의 기도’에 나온 핵심적인 청원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이는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것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청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베르너M. Werner가 묘사했듯이 교회의 형성 과정 전체를 하나의 탈脫종말론적 과정Enteschatologierung으로 볼 수 있다.
1장 문제 제기, 29쪽

그리스도교 내에서 종말론과 관련된 내용은 감소하였으며, 종말론의 역사는 마치 퇴락의 역사처럼 받아들여진다. …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오래 전부터 초기 그리스도교의 ‘마라나타Maranatha’와 중세의 ‘디에스 이레(Dies irae, 진노의 날)’ 사이의 대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편으로는 2세기 초의 『디다케』에서 “자비가 오시어, 세상은 지나가리.”라는 문장이 보여 주듯이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쁜 희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이란 공포와 영혼 구원에 대한 위협의 징표 아래 느끼게 되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세 번째 기둥 역할을 하는 것은 19-20세기에 행해진 대중 선교를 위한 표어Motto ‘네 영혼을 구하라.’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개인화 과정이 도발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보이며, 종말론의 핵심이자 그리스도교의 중심 내용인 ‘도래할 세상의 구원에 대한 가시적이고 공동체적인 희망’은 상실된 듯하다.
1장 문제 제기, 32쪽

(2백 년 전의 유럽인들에게) 복음 말씀은 언제나 복음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고, 그리스도교적인 것이야말로 실제적인 것이었으며, 인간의 삶과 죽음은 모두 이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확신에서 자라는 기쁨은 바로 바로크의 성전 미술과 바로크 음악의 쾌활한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정반대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다스리는 가치’라고 말한다면, 이는 일반인에게는 그저 공허한 주장으로 들릴 뿐이다.
2장 성서학적 근거에 따른 문제, 49쪽

우리는 말씀-형식과 실재 사이의 긴장을 필연적으로 종말론적인 언어 형식을 통해 인식했다. 그러나 이런 긴장 관계는 말씀이 교회 안에서 그 책임을 다하는 경우에만 유효하다. … 만일 말씀의 불변성과 그 미래성을 보증해 주는 교회의 공동체성이 없다면, 모든 설명이나 예언들은 권위 없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상에 대해 상호적으로 자기비판을 하는 경우 계속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데에도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3장 오늘날 관점에서 본 말씀과 실재, 75-76쪽

구원은 모든 이가 원하는 것이어야 하고, 모든 이에게 베풀어져야 한다. 이로부터 구원은 돈을 넘겨주듯 인간에게 단순히 외부로부터 내려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을 주체로 요구한다. 이로부터 ‘종말’과 ‘전환’ 사이의 간극이 다시 한 번 이해된다. 인간은 ‘예’나 ‘아니요’로 대답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주체가 되고, 이로부터 하느님의 시간을 받아들인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 나라의 생산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주체이고, 아들 때문에 주체이다.” 하느님이 되는 것, 모든 소외와 모든 낯선 것을 없애 주시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 누리는 ‘인간 해방’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선물이다. 순수한 사랑이 그 본질에 따라 선물인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희망’이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세상을 ‘실험실’이라고 규정했는데,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다. 희망은 사랑이 있는 곳에만 존재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넘어 사랑이 나왔으니 인간은 희망을 가져도 된다.
3장 오늘날 관점에서 본 말씀과 실재, 96-97쪽

‘죽음’이라는 문제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관점은 모순적이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있다. 죽음은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서 가능한 한 숨겨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의식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무엇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에 관해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현상도 보이는데, 이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금기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심리와 꼭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4장 죽음의 신학, 99쪽

인간은 질병으로 느끼게 되는 인간 삶의 신체적 한계를 통해서는 물론이고, 인간의 중요한 영역에서, 예컨대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이 자신의 영혼에 깃들었을 때에, 혹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가 다스릴 수 없을 때에 자신의 삶에 닥친 불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랑을 스스로는 불러일으킬 수 없다. 자신이 사랑을 바라더라도 사랑을 기다려야 하고, 그 사랑을 묶어둘 수는 없다.
4장 죽음의 신학, 128쪽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돌아가신 하느님은 모든 기대를 뛰어넘어 사랑의 구조를 완성하시고 신뢰를 입증하신다. 그 신뢰의 유일한 선택은 결국 자기 포기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라고 전달되는 말씀은 이제 매우 실제적인 의미를 얻는다. 즉,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힘, 어디에서나 그의 생명을 제한하는 이 힘은 보이지 않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그에게 충분히 주어진 사랑이다. 따라서 그 사랑은 그를 위해, 그리고 그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알고 있다. 자신이 지속적으로 처하게 되는 자기 낮춤은 자신이 사랑으로 창조된 존재임을 생각하면서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 존재는 신뢰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강요하지 않는 선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을 빼앗으려 하고, 인간의 생명을 훔치고자 하며, 그래서 인간의 적이 되는 죽음은, 인간이 신뢰와 사랑의 태도로 죽음의 약탈 행위에 맞설 때, 그리고 그러한 약탈이 삶을 더욱더 변모시키려 할 때 극복될 수 있다. 죽음은 죽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사랑의 전권全權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죽는 곳에서는 죽음이 극복된다.
4장 죽음의 신학, 129-130쪽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이 세상에 부여된 과제를 피해서 저승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영혼 구원만을 위해서 뒤로 물러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구성하는 요소는 바로 공통의 정의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전 인류의 정의를 위해 희생되었고, 이를 통해서 온 인류에게 정의가 선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보증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아가 종말론은 정의와 진리를 실천하라는 격려이자, 도전하도록 요구받는 것이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바치는 것이 바로 종말론의 내용이다.
4장 죽음의 신학, 133쪽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는 생명이고, 따라서 각 단계의 삶을 생명이신 하느님의 선물이자 광채라고 긍정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통으로 삶에 그늘이 드리워지더라도 삶을 긍정한다. 그런 이유에서도 삶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그런 이유에서도 삶은 존재와 의미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에 ‘가치 없는 삶’이란 없다. 삶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삶이 있는 곳에 온갖 그늘이 드리워지더라도 말이다.
4장 죽음의 신학, 133-134쪽

성경적 근거와 함께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없이는 여기서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
사람들은 종말 임박 기대라는 문제에 대해서 ‘종말’은 더 이상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먼 훗날 맞이하게 될 달력상의 어떤 날이 아니라 모든 시간성 밖에 있는 비非시간적인 것이며, 그럼에도 결국 모든 시간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5장 영혼 불멸과 죽은 이들의 부활, 140쪽

시간이란 인간이 육체적으로 살 때 이해되는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은 시간 밖으로 걸어 나와서 영원으로, 그 영원 속에서 유일무이한 ‘오늘’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과 부활 사이에 관한 ‘중간 상태Zwischenzustand’라는 문제는 실체가 없는 문제이다. ‘중간’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종말’은 시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다. 죽은 이는 마지막 날, 심판, 주님 부활과 재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도 죽음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이지, ‘마지막 날’에야 시작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리아에 관한 교의가 말하는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죽음 건너편을 지배하고 있는 비시간성에 근거해서, 모든 죽음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주님의 재림과 부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5장 영혼 불멸과 죽은 이들의 부활, 141쪽

인간이 직면한 상태는 호수 위를 걸으려고 애쓰는 베드로에 비유할 수 있다. 그는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가려 한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철학자는 이른바 호수 위에 있는 베드로다. 그는 숙고하면서 죽음이라는 운명조차 짓밟고 생명을 바라보려 한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는 물에 빠지고 만다. 그가 불멸에 관해 숙고하면서 쏟은 모든 힘은 결국엔 서 있기에 충분치 않다. 덧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은 바라보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보다 힘이 훨씬 세다. 주님이 내미신 손만이 물에 빠진 베드로를(인간을) 구해 주실 수 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철학적 인식은 물 위를 잠시 걸을 수 있는 상태로 머물 수 있을 뿐, 굳은 땅을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당신의 힘으로 우리를 끌어올리시고 붙잡아 주시는 분만이 우리를 덧없음이라는 호수 위에 서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보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마음이 깨끗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은 주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다.
5장 영혼 불멸과 죽은 이들의 부활, 188쪽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스스로 불멸을 바란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불멸을 이루고 싶어 한다.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은 죽지 않는다Non Omnibus Moriar. ‘이룩하여 남긴 것Monumentum Aere Perennius’은 나 자신의 일부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영원을 이루고자 그렇게 애쓰면서 인간은 결국 무너져 내릴 수 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실체 없는 곳으로 추락하고, 자신의 생명을 그 실체 없는 것, 죽음에 넘겨준다. 바로 이것이 창세기 3장 3절에서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죄와 죽음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실존하면서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 자발적이고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기”를 바라지만, 저승에 있게 되고 무無의 상태에 머물게 되며 어둠 속에서 살게 된다. 이는 실제 삶 밖에서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를 거부하거나 폐기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겨난 것은 순전한 무가 아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듯, 인간은 언제나 창조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고, 스스로 창조를 이루지 못하며, 그렇다고 창조를 순전한 무로 결코 추락시킬 수도 없다. 따라서 인간이 그런 식으로 순전한 무의 추락을 야기하게 되는 것은 존재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자 자기 자신을 거부할 가능성, 곧 ‘셰올’이다. 비록 세상에서 거부되었거나 잊힌 사람들일지라도, 비존재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진리이신 하느님께 속할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
5장 영혼 불멸과 죽은 이들의 부활, 192쪽

불멸은 업적이 아니다. 불멸은 창조의 은사일지라도, 단순히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멸은 이러한 상태로 머물다가도, 어느 순간 인간이 감당해야할 숙명으로 바뀌기도 한다. 불멸은 우리가 참여하고 함께하는 관계에 기인하지만, 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불멸이라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Eritis Sicut Deus.’라는 주장에 맞서고, 구원을 헛되게 가리키고 있는 인간에 의한 해방에 맞서고 있다. 불멸이란 바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고, 이는 자신을 철저히 낮춘 예수의 삶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필리 2,5-11). 만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과 사랑의 능력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장소, 영원한 생명이 의미 있게 되는 장소가 된다면, 이 영원한 생명은 오늘날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은 인간에게 세상을 낯설게 하지 않고 혼란스럽고 일정한 형태가 없는 상황에서 인간을 구해 내고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도 ‘몸의 형상Forma Corporis’이 될 것이다.
5장 영혼 불멸과 죽은 이들의 부활, 193쪽

우리가 마주했던 많은 근대적인 이론들이 그 상반된 출발점에도 불구하고, 영혼 불멸보다는 부활 개념과 관련해서는 회피한다는 점이다. 부활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본질적으로 스캔들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신학은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에 훨씬 더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런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방법론적으로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5장 영혼 불멸과 죽은 이들의 부활, 197쪽

앞 장에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물음에 먼저 영혼의 ‘불멸’과 ‘부활’에 반대하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했다. 그 결과, 현대 신학에서는 ‘불멸’이 매몰차게 거부되고 ‘부활’은 열렬하게 지지한다는 관점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부활’ 개념은 그 내용이 신속히 바뀌었고 부활에는 시간적 요소가 배제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 부활이 죽음 직후로 옮겨 가게 되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6장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201쪽

죽어 가는 사람은 스스로 역사 밖으로 걸어 나가고, 이제 역사는 그에게 일시적으로는 끝난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의 관계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인간 세계에서 관계의 그물은 인간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죽어서 부활한다는 생각은 역사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사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역사는 본질적으로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역사의 실재성과 사후의 생명에 대한 시간적인 목록들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개념에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하느님 개념은 그리스도론에서 표현되고 시간 한가운데서 하느님이 시간을 주관하시는 것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6장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222쪽

아직 보속되지 않은 죄, 죄로 인해 여전히 직접적으로 당하는 고통이 ‘연옥’이다. 이에 따라 연옥은 현세에 남겨 놓은 것에 대해 마지막으로 고통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미 궁극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확신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 끝없이 힘들어하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인 잔치가 미뤄진 때에, 최종적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에, 하늘은 한편으로는 실제로 신적 기쁨의 충만함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기쁨은 무한히 이루어지고 지속되며, 순수하게 충만하듯 잊히지 않으며,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기쁨은 완성되는 정의와 사랑의 확신이자, 자신의 고통을 비롯해 여전히 지속되는 현세적 고통, 마지막 힘이고 그래서 불의가 발붙이지 못하는 가시적 사랑 안에서 온갖 물음을 안고 있는 고통의 중단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기쁨 안에서, 고통당하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앞당겨져서 이미 극복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참된 ‘하늘’이라 할 수 있다.
6장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228쪽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서 그리고 동시에 자신 밖에서 존재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 안에서도 존재한다. 개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사람이 하나의 유기체라는 것, 그리고 이에 따라 전체의 운명은 각자의 고유한 운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각 개인의 삶에 대한 판결은 그가 지상 활동을 마치고 난 후, 죽음에서 확정된다.…
각 개인을 전체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에게 제자리를 정해 주는 최후의 공심판이다. 그 자리는 그가 전체 안에 있을 때에야 받게 되는 것이다.
6장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229쪽

‘기다림을 준비한다는 것’은 뭔가 변모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그것을 인식하든지 거부하든지 세상은 달라진다. 하지만 기다림을 준비하는 것은 세상이 공허함에 빠져 기다리고 있든지 아니면 맞서든지 간에 또 다른 것이다. 세상이 그 표징을 인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은 자신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들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확실해진다.
6장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241쪽

우리는 이제 ‘가다(십자가)’와 ‘오다(부활)’가 내면으로부터 스며든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분으로서 또한 계속 길을 가시는 분이며, 동시에 손바닥에 못 자국이 있는 분으로서 항상 오시는 분이다. 그분의 계명인 사랑에서 그분의 오심은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세상 한가운데서 이루어진다(요한 14,15-31 참조). 교회는 부활하신 분과 교류하면서 그분의 재림을 상기시킨다. 교회는 기도하고, 주님의 재림으로 들어가 사는 듯하다. 주님의 재림이 드러나는 것은 부활의 신비가 궁극적으로 밝혀지는 것이자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관찰하기 위해 재림이라는 주제는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사색하기를 멈춰야 한다. 재림이라는 주제는 그 내적 연관성과 끊임없는 자기 극복에서 전례와 그리스도교적 삶의 해석이 된다. 재림이라는 주제는 전례를 희망의 축제이자 우주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기리는 축제로서 거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재림이라는 주제는 주님이 머무실 수 있는 사랑의 출발점이자 집합점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집에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해 먼저 가셨다(요한 14,2-3). 교회는 전례에서 마치 그분과 함께 가는 것처럼 세상에 그분의 거처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 ‘깨어 있음’이라는 주제는 전례를 실제로 거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임무 속으로 들어가면서 심화된다. 주님께서 친히 전례에 최종적인 실재성을 주실 때까지, 그동안에는 그저 표상에서만 찾을 수 있던 그 실재성을 주실 때까지.
6장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244쪽

그리스도는 어느 누구에게도 멸망을 선고하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구세주시다. 그분 곁에 서 있는 사람은 구원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재앙은 그분이 선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초래되는 것이다. 재앙은 자기 자신의 것만을 고수한 데에서 비롯된다.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길 잃은 자가 스스로 경계선을 긋고, 구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임을 확연하게 보여 준다.
6장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245쪽

인간은 결국 스스로 심판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재앙을 선고하지 않으신다. 인간만이 자신의 구원을 제한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단순히 지켜보고만 계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분의 지상 생활의 심오한 의미는 하나의 몸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 ‘완성’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분의 몸은 그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분께 속한 이들과의 만남에서, 그분의 몸을 모시는 가운데, 즉 성체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 우리의 진리는, 만일 신학적이고 그리스도론적으로 말한다면, 그분의 몸과 그리고 그분의 고통받는 지체들이 우리와 맺는 관계에 달려 있다.
6장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247쪽

인간은 죽음에서 나와 숨겨지지 않은 실재와 진실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제 진실에 따라 자신에게 속한 자리에 앉는다. 인생의 가면극, 지위와 기능 뒤로 도망친 것은 이제 지나갔다. 인간은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존재한다. 죽음이 가져오는 것, 즉 이렇게 가면을 벗어 버리는 데에서 심판이 이루어진다. 심판은 단순히 진실 자체이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진실은 물론 단순히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시고, 진리는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인격Person’이시다. 진리는 신적인 특성을 지닐 때만 심판할 수 있는 진리가 되는 것이고, 이때 궁극적인 진리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이 되신 분으로서 인간에게 진리이시다. 이렇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인간의 표준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진리의 기준이 되신다.
6장 죽은 이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246쪽

연옥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은 중세 때 동방 교회와 일치를 이끌어내고자 개최된 두 공의회에서 그 최종적인 형상을 찾아냈다. 그러고 나서 종교 개혁 운동과 대립하는 가운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다시 한 번 정리되어 기술되었다. 이렇게 확정되면서 그 역사적 장소와 그 교회 일치 문제도 내비쳐졌다. 우리는 5장에서 신약 성경이 죽음과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부활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의 물음을 해결하지 않은 채 열린 상태로 두었으며, 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는 그리스도교 인간학이 전개되면서 점차 그리스도론으로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해명 과정 안으로 ‘연옥 이론Fegfeuerlehre’이 들어왔다
7장 지옥, 연옥, 하늘, 259쪽

연옥은 저승에 있는 일종의 강제 수용소가 아니고, 인간에게 부과된 벌을 실증적인 방식으로 보속해야 하는 곳도 아니다. 오히려 연옥은 인간이 변모되기 위해 내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성인들의 통공과 함께 그리스도의 능력, 신적인 능력을 갖게 되고 일치할 능력도 갖게 된다. …
믿음의 핵심인 “예!”가 인간을 구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결정은 우리 가운데 대다수에게는 사실 많은 풀과 나무와 지푸라기에 의해 감춰져 있다. 인간은 자신이 벗어나지 못하는 이기주의라는 격자의 구조물에 갇힌 채 근본적인 결정을 향해서 가까스로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자비를 받아들이지만, 변모되어야 한다. 주님과의 만남은 이러한 변모의 불이고, 영원한 기쁨의 용기가 될 수 있는 저 티 없는 형상으로 그를 태우는 불이다.
7장 지옥, 연옥, 하늘, 272-273쪽

하늘은 고립을 알지 못한다. 하늘은 성인들의 열려 있는 공동체이며, 모든 인간적 요소들이 함께 어울리며 완성되는 곳이다. 거기서는 경쟁이 일어나지 않고, 하느님을 뵙기 위해 순수하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성인 공경은 그러한 앎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성인 공경은 성인들이 신화적인 차원에서 전능하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지니고 있는 분리되지 않는 개방성이 그들과 함께 하고, 또한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제한되지 않는 사랑의 가까움을 전제한다. 이 사랑은 다른 신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달할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학적인 구성 요소도 결과로 나온다. 즉, 자아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것, 주님과 서로를 위해서 나에게 유용한 것은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정화되는 것이다. 자아가 정화될 때 동시에 그 최상의 가능성도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이제 다시 각자에게 개인적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을 자신의 방식으로 바라본다. 누구나 전체적인 사랑을 자신의 유일무이한 방식에서 받아들인다.
7장 지옥, 연옥, 하늘, 277쪽

들어 높여진 그리스도는 ‘세상으로부터 떠나가’신 게 아니라 세상을 뛰어넘으시고, 그런 가운데 세상과 연관 짓고 계신다. ‘하늘’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존재 형태에 관여함을 의미하고, 따라서 세례와 함께 시작된 것이 다시금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공간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 하늘은 우리가 사는 공간의 구조 밖에서도, 안에서도 규정될 수 없다. 그러나 하늘은 ‘상태’로서 우주와의 연관성으로부터도 단순히 분리될 수 없다. 오히려 하늘은 영향력이 미치는 세계 내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새로운 ‘공간’, 성인들의 통공이 이뤄지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늘은 공간적으로 규정되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위’에 있다.…
하늘은 그러한 ‘종말론적’ 실재로서, 결정적인 것 내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들려 올리는 것이다. 하늘이 지닌 이 결정적인 면은 바로 하느님의 돌이킬 수 없고 나뉠 수 없는 결정적인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하늘이 지닌 개방적인 면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전 피조물에 개방된 것으로부터 완전한 종말에 이른다. 주님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가 모여 있을 때에만 하늘은 온전히 완성될 것이다. 그리스도 몸의 이러한 완전성은 ‘육신의 부활’을 포함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재림Parusie’이다.
7장 지옥, 연옥, 하늘, 279-280쪽

종말론에 대해 전체적으로 기술할 때 지배적인 의견이 이미 확고하고, 새로운 생각이 자리 잡기 어렵다고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한 토론이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논쟁의 세 영역을 간략히 언급하려 한다. 본질적인 신학적 토론, 이 물음에 대한 철학적이고 철학사적이며 인문학적인 노력,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가 그것이다.
8장 제6판에 대한 후기, 289쪽

그런데 사람들이 몸과 영혼의 구별을 부정한다면 죽음을 넘어 인간에게는 도대체 어떤 희망이 남아 있을 수 있는가? 루터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인간은 ‘잠을 잔다.’라고 상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이런 물음이 등장한다. “누가 잠을 자는가?” 점차 소멸되어가는 몸에 비추어 사람들은 단순히 ‘잠’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잠과 구별될 수 있는 어떤 지속적인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영혼이라 불러서는 안 될 이유가 있을까?
9장 죽음과 부활 사이 - ‘중간 상태’ 물음에 대한 보완적 성찰, 319쪽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을 갈망하게 하는 것일까?” 이는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바로 사랑에 대한 체험이다. 사랑은 연인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따라서 자신도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지는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대답은 이렇다. 불멸은 인간 자신 안에 숨어 있지 않다. 불멸은 하나의 관계에 기인하는데, 바로 영원하고 영원을 의미 있게 하는 것과의 관계에 기인한다. 생명을 주고 충만하게 할 수 있는 이러한 영속적인 것은 진리이고, 사랑이다. 인간은 영원함을 주는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살 수 있다. 이러한 관계가 인간 안에서 하나의 발판을 찾아내는 것을 우리는 ‘영혼’이라 부른다. 영혼은 인간이 진리와, 영원한 사랑과 관계를 맺는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현실성이 연속되는 것은 옳다. 사랑인 진리는 하느님이시다. 이 진리는 인간에게 영원함을 준다. 그리고 물질은 인간의 정신 안에, 인간의 영혼 안에 통합된다. 그래서 물질은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고 부활에 이르게 된다.
9장 죽음과 부활 사이 - ‘중간 상태’ 물음에 대한 보완적 성찰, 328쪽

우리의 희망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이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과 함께 추구하게 하며, 일치를 이루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역사적 이성의 재건을 통해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지닌 역사 전체를 통해서, 다시 말해 교회 안에서 생겨난다. 이것 역시 역사적 이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 않고, 이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한 축을 제공한다. 신학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스도교 역사가 교회 안에서 살아 있는 일치를 위해서 신학이 다시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신학은 당면한 주제들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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