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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언어의 온기

안티-언어의 온기

: 마음이 치유되는 아름다운 언어 힐링, 그 따뜻한 언어에 믿음이 부족한 순례자, 영원의 집을 찾아 일회용 집을 떠도는

성하 | 슴베 | 2020년 07월 07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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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7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176쪽 | 300g | 140*200*20mm
ISBN13 9791197072307
ISBN10 119707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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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어가 빛이라면

너의 언어는 달빛이다
달빛 용광로에 다른 언어는 녹고
새로운 언어가 태어난다

나의 언어는 바닷빛이다
언제나 뭍을 그리워하는 떠돌이 언어
달빛 그림자에 숨을 때가 많다

눈이 좀처럼 내리지 않는 곳
밀물 끝 파도 조각들이 얼어서 쌓인다
멀리서 보면 마치 눈밭 같다

사리가 지난 바다는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밤
사금파리 눈밭을 비치는 달빛
우리는 다시 빛으로 만난다
--- 「1장 빛」 중에서

질주

섬세한 말, 아름다운 말, 따뜻한 말
온갖 말들이 경주로에 섰다
뜨거운 모래에 편자가 녹아내린다
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높은 순위만이 돈을 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화상경마장 영업이 끝나고
몰려나오는 사람들은 구별이 어렵다
잿빛투성이 얼굴, 옷차림, 그림자 들
말 없이 전철역으로 행진한다
택시 운전사가 행운의 말을 잡은
손님을 태우고 유흥가로 질주한다
--- 「1장 빛」 중에서

대화 1

농기계에게 소음장치는 사치품이다
농약을 치는 아빠에게 마스크와 보호복이
필요 없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농약통을 짐칸에 실은 경운기에 있던 나는
논에서 아빠가 손을 올리고 주먹을 쥐자
클러치 레버를 잡아당겼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조금씩 경운기를 운전했다. 밭에서 경운기를 천천히 몰던 나는 짐칸에 실은 거름을 도라지창으로 흩뿌리는 아빠가 손짓하는 방향으로 조향클러치 레버를 움켜잡고 핸들을 틀었다.

무논에 들어갈 채비에 경운기 타이어 바퀴를 쇠바퀴로 바꾸려고 너트를 풀고 잠그며 와셔가 풀밭에 숨바꼭질하지 못하게 챙기느라 바쁜 나에게 아빠는 이런저런 국내외 정세를 들려주었다. 아지랑이 피는 들에 경운기 시동이 다시 걸리면 우리는 몸짓과 눈빛으로 언어를 바꾸고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 「2장 소리」 중에서

저녁

갯벌에 나가신 엄마는
언제 뭍으로 올라오시나?
곰솔밭 모래성 아래 뚫어 놓은
굴에서 어둠이 솟아나는데

부엌 굴뚝에서 볏짚을 태우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을 알리는 숭고한 의식처럼 집집마다 노을 지는 하늘 위로 날아가는 하얀 연기에 밥 짓는 냄새가 피어나고 밤이 내려온다. 바닷가 곰솔밭에서 같이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나는 굴을 따러 간 엄마를 기다리며 밀물이 드는 검은 바다를 바라본다.

아궁이에서 부삽으로 재를 떠내며 불의 무게를 가늠한다. 부뚜막 위에는 가스버너와 이런저런 살림살이가 놓여 있다. 찬장에는 쇠그릇과 사기그릇이 엎어져 있다. 부엌 흙바닥은 고단한 엄마의 몸처럼 점점 단단해졌다. 아궁이 불에 구워지는 연약한 몸의 거대한 테라코타.
--- 「3장 공기」 중에서

당신이 기뻐했던 나의 마지막 말
삼국유사』 조신의 꿈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맨얼굴은 환했고 빨간 체크 무늬 셔츠와 청바지는 새 옷처럼 밝았습니다. 당신은 미운 오리 새끼에서 나에게 가난하지만 즐거운 백조가 되었습니다. 함께 살 수 없었지만 정들고 사랑하기 그지없어 인연이라 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사이 일자리를 찾아 낯선 잠자리를 떠도는 부끄러움의 무게가 산과 섬이 되었습니다. 그런 날은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다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고운 얼굴, 아름다운 웃음은 아스팔트 위의 이슬입니다. 버팀목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현수막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미래의 날개를 접고, 나는 당신 때문에 거푸집만 세울 뿐입니다. 지난날의 기쁨은 근심과 고통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서로 걱정하는 것보다 짝 잃은 새가 마주볼 거울을 가지는 게 낫겠습니다.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좋으면 가지는 것은 차마 사람 마음으로 감당 못할 짓이지만, 헤어짐과 만남 또한 밟으면 사그락대는 등꽃들처럼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삶은 아카시아를 따서 한 잎, 한 잎 떼어내는 것도 아니므로 차라리 이쯤에서 헤어져야 합니다.
--- 「7장 순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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