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로나19의 시대
2020년은 의문의 여지없이 “코로나19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올해의 반이 지나가는 동안, 우리의 머리는 코로나에 사로잡혀 있었고 우리의 삶은 그로 인해 큰 제약을 받아야 했다.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은 올해의 나머지 반이 지날 때까지도 변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혼란과 파국으로 이끌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은 폭과 깊이에서 한마디로 2020년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2020년이 코로나의 시대로 기록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 많은 고통과 혼돈을 겪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기록되는 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크게 바꾸고 있고 또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역사는 이제 코로나 이전의 시대, 즉 BC(Before Corona)와 코로나 이후의 시대, 즉 AC(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코로나 이후의 우리의 삶은 이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과장이 좀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이전과 이후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단절의 지점이나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 지점으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 냈던 무수한 사건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성찰하고 분석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을 뿐이다. 코로나 팬데믹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이후에도 우리는 이전처럼 여전히 사랑하고 증오하며 살아갈 것이며,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차별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고 맞서 싸워 왔던 그 모든 문제를 우리는 앞으로도 마주해야 할 것이다.
--- 「언택트 시대 ― 군중과 민중 사이에서」 중에서
어느 기본소득 옹호자의 말처럼 기본소득은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아이디어다. 그저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니 전혀 복잡하지 않으며, 그 돈이 각 개인의 물질적 기반이 되어 잠재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력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아니 바로 그런 이유로, 기본소득은 복잡하고 다양한 쟁점을 제기하며,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지배적인 질서 자체를 문제시하는 수준으로까지 논의가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기본소득 논쟁도 이런 운명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초기에, 찻잔 속의 태풍 같은 일이긴 했지만, 좌파라 불리는 사람 가운데 일부는 기본소득이 (생산수단의) 소유권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거나 현금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시장/화폐 관계를 강화할 것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이런 식의 문제 제기가 추상적인 수준에서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상상 속의 공격이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공산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고무하고 연결함으로써 포스트자본주의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포스트자본주의사회가 ‘재산의 분할 불가능성’이라는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한 사회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물론 일부 기본소득 지지자는 인간의 절대적 평등과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언명만큼 중요한 것은 실제로 공산주의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다.
초기에 벌어졌던 일부 좌파와 기본소득 진영 사이의 논쟁은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의 현실성이 지극히 낮았기 때문에 유령과의 싸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기본소득을 비판했던 일부 좌파도 유령이긴 마찬가지였기에 유령들의 싸움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 「반복과 차이: 기본소득 논쟁의 의미」 중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모델이기도 한 이용수 씨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적 활동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권운동가다. 그런 그가 2020년 5월 7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 전 이사장인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인의 기부금 횡령 의혹을 제기하며 수요집회 불참을 선언하자,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켜 이른바 “정의연 사태”가 촉발되었다. 기부금 중 극히 일부만이 피해자들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의혹, 회계 자료 공시에 따른 논란, 안성 쉼터의 고가 매입, 부실 운영, 헐값 매각 논란 등 주로 돈과 관련해 증폭되던 의혹과 논란은 5월 25일 이용수 씨의 2차 기자회견 이후 다른 방향과 국면으로 나아갔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 정의연의 30년 ‘위안부 운동’의 정당성마저 의심받는 상황으로 말이다. 우선 2차 기자회견에서 나온 이야기 일부를 그대로 옮겨 본다.
정신대대책협의회는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입니다. 그런데 공장 갔다 온 할머니들 하는 거는 정신대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중략)
정신대대책협의회는 공장 갔다 온 할머니들로 해야 하는데, 말하자면 빵으로 말하자면 공장 갔다 온 할머니들은 밀가루로 반죽해서 빚어 놓고 속은 맛있고 귀한 걸 넣어야 안 됩니까? 그 속은 위안부입니다. 그걸 30년을 해 와도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중략)
왜, 뭐 때문에, 정신대대책협의회면 정신대 문제만 할 것이지, 왜 지네가 무슨 권리로 위안부 피해자를 사용합니까? (중략) 위안부하고 정신대하고 어떻게 같습니까? 위안부는 생명을 걸어 놓고 거기 가서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걸 30년을 이용해 왔습니다.
--- 「정신대, 일본군‘위안부’, 일본군성노예」 중에서
2046년 7월. 소녀와 소년은 중학교에 함께 다니고 있다. 시간이 흐른 후, 소녀의 목소리. “세계란 단어가 있다. 난 중학교에 다닐 무렵 세계란 휴대폰의 전파가 도달하는 곳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있잖아, 난 지금 어디 있는 거니?” 소녀는 지금 우주 어딘가에서 로봇을 조종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소녀와 소년은 함께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꿈을 꾸지만, 소녀가 우주연합군의 멤버로 선발되어 우주로 떠나온 것. 이후 소녀는 우주에서, 소년은 지구에서 서로 휴대폰으로 문자를 교환한다. 소녀가 지구에서 멀어질수록 문자가 도착하는 시간은 길어져 간다. 2047년 8월. 소녀는 전투 중이다. 이미 태양계에서 멀리 떨어져 지구와 8.7광년 거리. 열다섯 살 소녀. 지금 보내는 문자는 스물네 살 청년이 된 소년에게 도착할 것이다. 8.7년. 영원과 다를 바 없는 시간. 난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세계는 어떻게 될지,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소녀는 말한다. “확실한 건 단 한 가지. 나는 여기에 있다.”
신카이 마코토의 첫 번째 중편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2002) 의 내용이다.
이 글은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2016)과 《날씨의 아이》(2019)라는,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 이후 만들어진 두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일본이 재난을 대하는 어떤 태도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두 편의 애니메이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별의 목소리》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별의 목소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별의 목소리》는 세계와 나, 그리고 너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계는 뭐지? 난 누구지? 나와 너는 만날 수 있을까? 여기는 어디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지만 단 하나는 확실하다. 지금 소년에게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나, 소년을 그리워하는 나, 소년을 사랑하는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은 서구의 근대의 발화점인 데카르트의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꿔 놓는다. 서구 근대문명, 과학 문명, 수학적인 세계의 시작인 ‘회의하는, 의심하는, 생각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사랑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으로 바꿔 놓는다.
---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재난을 대하는 일본의 어떤 태도를 보다」 중에서
상여 행진, 죽음의 위협에 맞서는 절규
매주 월요일 아침 8시, 경주 월성핵발전소 홍보관 근처에 차려진 천막 농성장 앞에는 상여가 등장한다. 머리는 희끗하고 얼굴은 주름진, 조끼를 입은 주민 여럿이 행진한다. 상여를 핵발전소 정문까지 끌고 가는 이들은 나아리, 나산리 주민들이다.
2014년 8월 25일부터 시작된 농성은 이미 2,100일을 넘겨 2,200일을 향하고 있다. 처음 3년 동안은 매일 아침 상여를 끌고 시위를 했다. 400여 가구 800여 명 주민의 이주 대책 요구는 왜 이토록 오래도록 이뤄지지 않을까?
황분희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 부위원장의 집에서는 거대한 원형 돔이 보인다. 1986년 8월에 이사를 왔으니 34년 됐다. 삼대가 모여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평화롭게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월성핵발전소에서 1.2km 거리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핵발전소를 신기한 듯 구경했다고 한다. 원형 돔의 위용과 주기적으로 배출되는 증기의 특이한 소리와 버섯 모양이 자랑스럽기도 했단다.
수십 년이 지나면서 원형 돔은 절망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에서 하나둘 암 환자가 생기더니 이 지역 해녀 162명 가운데 24명이 갑상샘암에 걸렸다. 3km 정도만이라도 떨어져 살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지만, 보상금을 많이 타기 위한 술수라는 모욕까지 당했다. 사랑스러운 손주의 몸에는 어른보다 두세 배 많은 삼중수소가 쌓여 있었다.
--- 「안전하게 살고 싶은 나아리 사람들 ― 나아리 연대 프로젝트 1주년을 맞아」 중에서
“핀을 찾다가 금화를 찾는” 행운이 얼마나 자주 찾아올까? 특히, 생명을 다루는 실험실에서.
일본의 분자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자신의 책 『동적 평형』의 머리말을 F 박사에 대한 짧은 우화로 대신했다. F 박사는 붉은 장미를 파란 장미로 만들고 싶어 한다. 달개비처럼 파란 장미.
장미가 파란색을 내기 위해서는 파란색 색소를 합성할 수 있는 효소 유전자가 필요하다. 이런 유전자는 장미에는 없고 달개비에 있다. 달개비에 있는 이 효소 하나만으로 파란 장미를 만들 수는 없다. 그 효소를 돕는 다른 효소군도 장미로 옮겨 와야 한다.
이 정도 작업으로 파란 장미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빨간 장미 쪽에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쌓여 있다. 빨간 장미에는 장미를 빨갛게 하는 색소 합성 메커니즘이 이미 있다. 그러므로 “파란 색소를 만드는 메커니즘을 이식하면 당연히 경쟁과 간섭이 발생한다.” 이런 방해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새롭게 합성된 파란 색소가 안정될 수 있도록 세포 안에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파란 색소를 안정시키는 시스템을 달개비에서 가져와야 한다.
--- 「이 책 저 책 읽으며/ 파란 장미를 찾아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