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공간에서의 남성의 비가시화는 이른바 여성의 노동으로 알려진 일들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폄하를 수반하며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을 보이지 않게 숨기도록 만든다. 그래서 사적 공간에서 여성에 의해 무급으로 수행되던 재생산 노동이 시장에서 화폐를 매개로 교환되는 유급노동으로 전환되어도 여성에 의해 수행되는 노동이라는 이유로 낮은 임금을 강요받는다.
--- p.41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메르켈의 경우 자녀가 없음에도 여성이기 때문에 정치 공간에서 엄마로 호명된다는 점이다. 이는 ‘여성’의 얼굴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얼굴을 ‘어머니’의 얼굴로 단일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여성의 어머니화’는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여성에게는 어머니의 얼굴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어머니 이외의 다른 얼굴을 갖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은 사적 공간에 있든 공적 공간에 있든 언제나 ‘어머니’여야 하며, 항상 ‘따스하고 자애로워야’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성 정치 리더는 정치 공간에서 ‘아버지’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남성 정치 리더의 리더십 덕목으로 꼽히는 것은 용기, 결단성, 단호함 등이며, ‘자상한 아버지’라는 이미지는 반드시 갖춰야 할 리더십 덕목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 p.59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복지국가는 바로 이런 남성 중심의 경제 개념과 노동 개념에 기초, 한 남성 노동자가 가족 임금을 통해 가족 구성원을 부양할 것으로 전제하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구축해 왔다. 전통적으로 남성을 가족의 생계부양자로 그리고 여성은 경제적으로 남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설정한 가운데,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을 실업, 질병 및 노년과 같은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왔다. 이런 가운데 여성은 흔히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성 혹은 국가에 의존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복지국가는 사회보장에 있어 여성과 남성을 상이하게 보장함으로써 불평등한 젠더관계를 재생산해 온 것이다.
--- p.81
‘젠더 격차’와 ‘가족 격차’ 사이의 ‘격차’, 즉 여성 간의 ‘계급 격차’가 오늘날 더욱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돌봄노동을 시장에서 구매할 수 없는 저소득층 여성의 경우, 노동시장에서의 유급노동과 가족 내에서의 무급노동을 동시에 책임질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돌봄노동을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는 고소득층 여성의 경우는 돌봄노동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노동시장에서의 유급노동에 전념할 수가 있다. 이는 젠더적 차원과 계급적 차원이 점차로 강하게 결합해 나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 p.102
일본을 향해 책임을 물을 때는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만, 공적 공간 내에 평등하게 존재하는 동등한 국민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여성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광복회의 입장, 그리고 포스트식민 국가의 영토 안에서 살아가는 같은 ‘국민’이라 하더라도, 남성 전사와 전사 영웅은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는 반면, 일본군 ‘위안부’ 여성은 같은 영토 안에 머무는 것은 허락되더라도 ‘1등 국민’과 ‘2등 국민’이라는 ‘분리의 원칙’에 따라 남성 전사의 명예를 훼손하지는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다른 공간’에 머물러야 한다는 광복회의 입장은, 포스트식민 국가인 대한민국 내부에서조차 공적 공간에 ‘박물관’을 건립함으로써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고, 그럼으로써 여성의 인권이 침해되는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내부적 탈식민화’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는 점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 p.151
2000년대 중반에서 2010년대 중반까지 한국 사회는 여성 청소노동자들에게 커피 전문점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값보다 더 적은 금액을 최저임금의 이름으로 지불했고, 저임금 노동으로서의 청소 노동의 현주소는 2020년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최저임금으로는 한 시간을 꼬박 일해도 제대로 된 밥 한 끼조차 사 먹을 수 없다”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외침은 한 인간의 노동의 가치, 특히 여성의 노동의 가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저평가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는 한국 사회가 여성을 어머니로만 바라보면서 여성을 노동자로 바라보지 않으려 하는 것, 즉 여성의 ‘어머니화’를 통해 여성의 노동력을 주변화 함으로써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려 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 p.174
대표적인 재생산 노동인 가사노동 및 돌봄노동 영역에서의 ‘여성적 서비스의 지구화’를 보면, 노동 분업이 한 국가 내에서 여성과 남성 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서 여성과 여성 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재생산 노동의 국제적 분업’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 사이에서의 새로운 국제적 노동 분업, 즉 고숙련에 고임금을 받는 선진국 여성과 저숙련에 저임금을 받는 개발도상국 여성 간에 새로운 노동 분업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전에 선진국 여성들이 무보수로 하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이제는 개발도상국에서 온 여성들이 보호도 안 되고 보수도 적은 고용관계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 p.194
여성은 로컬에서만 활동하고 글로벌과는 무관한 것처럼, 남성은 글로벌에서만 활동하고 로컬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일반화된다. 이러한 방식의 일반화는, 그러나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로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다. “우리 모두는 자라온 장소와 제도를 일종의 배경처럼, 무대처럼 지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로컬 여성이든 글로벌 남성이든 일상생활은 항상 일정한 로컬에서 전개되기 마련이며, “환상적인 속도로 화폐를 전 세계로 이동시키는 지구적 화폐 거래업자라 하더라도 …… 홍콩, 런던, 뉴욕, 그 밖에 다른 금융 중심지에 있는 스크린 앞에 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면 …… 자기 사무실에서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집으로 퇴근할 것”이라는 점에서, 글로벌 남성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로컬의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 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