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의 역사를 둘러싼 논쟁은 결론에 다다르지 못할 듯하다. 현대성 개념 자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역사적 시점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대개 ‘현대’의 기점은 인쇄술 초창기보다 후대로 잡히곤 한다. 증기 기관 발명과 산업화, 또는 더 후대로 1차 세계 대전 등이 흔히 꼽히는 계기다. 이 책은 1450년이나 1800년, 1900년 또는 1914년이 아니라 1700년 무렵을 기점으로 잡는데, 이 또한 내가 내세우는 논지다. 인쇄술이 현대성을 내포하기는 했지만, 구텐베르크가 이를 완전히 또는 즉시 실현해 주지는 않았다. 인쇄술은 현대성을 가능하게 했지만, 타이포그래피에서 현대적이라 인정할 만한 태도는 인쇄술이 발명되고 250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등장했다.
---「현대 타이포그래피」중에서
증기 기관, 이어 전동 장치가 인쇄 공정에 도입되면서 인쇄물 품질이 떨어졌다는 시각이 표명 또는 암시되곤 했다. 바로 이런 현실에 반발해 19세기 말 ‘인쇄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전 시기의 평균적 인쇄물을 검토해 보면, 그런 ‘몰락’이 허구에 불과함을 눈치챌 것이다. 인쇄 품질은 동력 인쇄기 도입으로 도리어 높아졌다. (...) 즉, 기술 혁신 자체가 품질을 저하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업자의 이윤을 유지 또는 증대하려는 목적으로 광범히 벌어지던 품질 저하와 희생에 기계가 동원됐다는 편이 정확하다.
---「복잡한 19세기」중에서
켐스콧 프레스 출간물의 힘은 상당 부분 시대착오적 성격에서 나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단순한 복고나 재현이 아니라 시대에서 동떨어진 책이었다는 뜻이다. 켐스콧 전용 활자는 분명히 과거 모델을 지향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특성을 창출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켐스콧 책에는 꿈 같은 면이 있었다. 상상 속 과거에 기초한 타이포그래피였지만, 풍부한 물성을 통해 적극적 발언으로서 현재에 강렬히 자리 잡은 타이포그래피이기도 했다. 이처럼 켐스콧 책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모리스식 이상주의에 잘 어울렸다.
---「반발과 저항」중에서
독일 인쇄 업계 대부분은, 전통주의건 현대주의건, 타이포그래퍼가 제시한 기준에 냉담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가 획일적이거나 일관성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는 말에도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 나치 정권 초기에는 당내에서 현대주의와 전통주의 사이에 논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3년에 현대주의 중심지에서 일어난 변화는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어떤 변화보다도 급격했다. 이 순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현대 디자인이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희망을 더는 유지할 수가 없었다.
---「신타이포그래피」중에서
게르스트너가 끼친 영향에 따라, 그리고 바젤 일반 산업 학교 교수 볼프강 바인가르트 주도로, 1970년대에 부상한 여러 디자이너는 스위스 타이포그래피의 몇몇 핵심 원칙을 깨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른 일반적 디자인 접근법과 마찬가지로, 스위스 타이포그래피 역시 경제 부흥기 서구라는 특정 시기와 장소에 적합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일개 양식이었건 아니면 객관적이고 몰개성적인 방법 실험이었건 간에, 스위스 타이포그래피는 현대화에 성공한 세계가 기술적 진보에 관해 품은 확신을 표상했다.
---「스위스 타이포그래피」중에서
위기가 지속되면서, 저항과 공격도 이어졌다. 1976년 무렵 음악에서 폭발한 펑크와 관련 그래픽은, 누구나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혁혁히 이바지했다. 1977년, 네덜란드의 저술가 겸 편집자 겸 디자이너 피트 스뢰더르스는 펑크 구호를 연상시키는 그래픽 디자인 방법을 주창했다. “1. 종이를 준비한다. 2. 레이아웃을 시작한다.” 이런 작업은 특히 영국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펑크 문화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을 꼽는다면 아마 네빌 브로디를 들어야 할 텐데, 그의 작업은 당시 넓은 타이포그래피 분야를 다시 주도하던 활자체 디자인을 살펴보기에 좋은?바인가르트보다 명쾌한?단서다.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중에서
디지털 기술이 끼친 직접적, 가시적 영향으로는 문자의 정체가 한층 불분명해진 점도 꼽을 만하다. 금속 활자에서 물체로 정형화되고 안정됐던 형태는 사진 식자를 거치며 이미 불안정해진 상태였다. 디지털화 과정에서 문자는, 디지털 기술의 본성 탓에, 파편화했다. 금속 활자 시절 확립된 활자체 분류법(로먼, 이탤릭, 볼드) 이나 간격 규칙 등은 이제 어떤 물질적 필연성도 없는 만큼, 변형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흔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 타이포그래피 품질은 수호해야 하는 가치가 되고 말았다.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중에서
1990년대에는 주요 관련 기업이?타이포그래퍼에게는 어도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가 특히 눈에 띄었다?연이어 제품을 수정, 보완하는 경주가 벌어졌다. 타이포그래피 역사가 언제나 그랬듯, 여기에서도 ‘순수한’ 디자인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디자인은 기술과 시장에 불가분하게 얽혀 들어갔다. 타이프 1보다 우수한데도, 트루타이프는 결코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연계한 일이 덫이 되어 디자인계에 파고들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중에서
이 장에서 주로 다루는 시기에는?1973년부터 현재까지는?현대성에 관한 논쟁이 쉴 새 없이, 너무나 요란하고 모순적으로 벌어진 터라 차라리 한 걸음 물러나 현대성이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유혹마저 일 정도다. 구호나 용어를 놓고 싸움을 벌이느니, 실제로 일어난 일을 간단히 기술하는 편이 진실에 다가서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성을 다루는 이 책을 마무리하려면, 그간 나온 말을 최소한 스케치할 필요는 있을 듯하다. 아무튼 그런 말도 실제로 일어난 일에 속하므로.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