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대한제국시대
이 시대의 사설철도에 대해서는 창시시대 편에서 상세하게 기재(記載)하고 있으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부산궤도주식회사
한국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어 경영된 부산궤도(주)선의 부산진~동래온천 간 10km의 증기철도는 실제 조선의 사설철도의 효시이며, 대한제국시대 유일한 것이었다. 이 철도는 1909년 6월 20일 부산 주재 오이케 주스케(大池忠助) 외 6명이 출원하여 같은 달 29일자로 한국 내무대신으로부터 특허를 얻어, 같은 해 8월 29일 부산궤도(주)의 설립등기를 마쳤다. 자본금은 10만 엔으로 하고, 선로는 전용궤도를 부설하여 궤간 0.6m, 증기동력, 26kg/m 레일을 사용하여 최급 기울기 40분의 1, 곡선반경 3쇄(鎖) 계획으로 회사 설립 등기 후 곧바로 건설 공사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11월 말일에는 부산진 성 내에서 동래남문까지 6.8km 구간, 12월 18일에는 동래남문에서 동래온천까지 3.21km 구간의 공사를 준공하여 12월 19일 거리 10.0km의 운수영업을 개시하였다.
당시 사설철도로서는 열차 운전에 관하여 어떠한 의거할 만한 법령이 없어, 회사는 감독관청의 인가를 얻어 열차운전규정을 제정하고, 보안방식은 표권식(票券式)에 의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통감부 철도청의 운전규정에 본보기가 되었다. 부산진?동래온천 간 운수개시와 함께 국유철도 부산?초량(草梁) 양 역과 사설철도 사이에 여객, 수·소화물의 연대운수를 하였다.
한국가스전기주식회사가 부산궤도주식회사를 매수함 : 이보다 앞서서 1906년 부산부 내(府內)에서 전차영업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가스전기(주)(1913년 조선가스전기(주)로 개칭함) 설립 발기인이 한국 정부에 그 특허를 출원하였는데,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아서 일시 중지되었다. 그 후 재계의 정세는 점차로 회복되었는데, 남작(男爵) 마쓰다이라 마사나오(松平正直), 동경마차철도회사 사장 무다구치 겐가쿠(牟田口元?) 씨 이하 27명이 발기하여 다시 계획을 세우고, 1910년 4월 23일 요시모토 덴쇼(吉本天祥, 도쿄), 사토 준조(佐藤潤象, 부산) 두 사람을 발기인 총 대표로 하여 부산에서의 전차, 가스 및 전등사업의 특허 출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8일 그 허가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회사 창립 준비를 진행함과 동시에 병행하여 기존 부설된 부산전등(주)(매수가격 20만 엔) 및 부산궤도(주)(매수가격 5만 5천엔)의 매수가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10월 18일 자본금 300만 엔(제1회 불입 75만 엔)의 한국가스전기(주)를 설립하고, 본사를 도쿄에 두고 지점을 부산에 설치하여 같은 달 26일 회사 설립 등기를 완료하였다. 한편, 피 매수 2사와의 연계를 가지고 조선총독에게 신청하여 같은 해 12월 18일 허가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부산궤도(주)가 경영하는 부산진?동래온천 간 10.0km의 조선에서의 효시가 된 사설철도는 후에 설립된 한국가스전기(주)로 매수되어 경영되었다.
선로의 개량 : 이 철도는 부산궤도(주)를 매수하는 허가 조건 중에 종래의 부산진?동래 온천 간 철도의 궤간 0.6m를 0.762m로 개축하는 1항이 있었다. 그런데 1912년 3월 20일 공사비 11만 4천엔을 계상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우선 부산진~동래남문 구간을 준공하여 운수를 하였다. 계속하여 남은 구간의 공사를 수행하여 같은 해 7월 11일 전 간 개량공사를 마쳤다. 이 개량공사로 선로 연장은 9.3km가 되었다.
열차 운전 : 부산진~동래 구간의 열차운전은 1911년 부산궤도(주)에서 매수할 당시에는 1일 5왕복으로, 사용차량은 기관차 2량(중 1량은 독일 베를린, 오레스타인 운트 코펠 회사 제조, 20마력, 최대속력 15.3km, 1량은 영국 글래스고, 앙트리에 바그레 상회 제조, 마력, 동력은 전자와 동일), 1등객차 2량, 2등객차 2량, 3등객차 2량이었는데, 같은 해 4월 부산진 창고가 전소(全燒)되어 차량의 대부분을 소실하였다. 이에 대한 응급대처의 일환으로 ‘트롤리’로 여객차를 수송하였다. 같은 해 8월부터 새로운 차량으로 운전횟수를 1일 6왕복으로 하고, 1913년 5월에는 국철선의 열차시각 변경에 따라 7왕복으로 증가하였다.
전차병용 : 이 철도는 개업 이래 동력은 증기였다. 겸업인 부산시내 전차와의 직통운전의 편의를 위해 1914년 12월 26일 전차병용의 허가신청을 하여 이듬해 1월 30일 허가를 얻는 것과 동시에 전차병용 운전을 하였다.
운수상황 및 성적 : 앞에서 서술한 대로 차고 화재로 차량의 대부분을 소실하고, 운수영업상 큰 타격을 받았는데, 궤간 0.6m를 0.762m로 개량하여 여객과 화물 모두 점차 증가하게 되어 순조롭게 좋은 성적을 올려 나가게 되었다. 여객운임은 3등석을 1마일당 2전으로 하고, 2등석은 2배, 1등석은 2배 반이 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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