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눈이 더 생긴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입니다. 더 이상 주어진 세계에 안주할 수 없으며, 눈에 보이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변화를 시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매우 보람찬 행보이지만 때로는 힘들고 안타까운 경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눈을 더 가진 우리는 불합리한 세계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죠. 그 눈 중 하나가 젠더(gender)입니다.
--- p.8~9
2018년 해일처럼 몰려왔던 미투(#me_too)는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성 차별적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차별과 폭력에 대한 민감성도 전에 없이 높아졌습니다. 권력형 성범죄자들이 무죄 방면되고, 인간적 호의를 성관계 동의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인지 미숙은 여전하며,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이 드러났고, 아동과 여성이 심각한 피해로 고통받는 만행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성평등을 위해 애쓰는 사회 운동가, 각종 단체, 의식 있는 교사와 법조인들은 현실을 적지 않게 변화시켜 가고 있습니다.
--- p.10
성 인지 감수성이란 기존의 성 고정관념을 성찰하고 인간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데 힘이 되어 줍니다. 성 인지 감수성을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사물과 사건을 구성해 봄으로써 사물과 사건을 보다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죠.
--- p.21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침 불행의 돌을 맞아 힘든 사람들의 고통을 조롱하고 무시할지 모릅니다.
--- p.51
성 역할보다 자기다움에 바탕을 둔 매력적 인간으로 성장하기, 그리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그게 바로 행복을 향해 가는 바탕이자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 p.67
경험의 한계, 지성의 한계, 공감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고정관념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상상력의 한계, 행동의 한계는 너무 뼈아픕니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에도 이런 오류는 무수히 발생할 수 있고요. 우리 모두 고정관념의 밧줄을 끊고 자기다움으로 뚜벅뚜벅 자유의 세계를 향해 걸어갈 날이 오길 기다립니다.
--- p.73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필요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화 과정의 결과물입니다. 근대화 시기에는 남성을 이상적 노동자로 모델화하기 위해 여성이 육아와 가사 노동을 전담하도록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성 역할 구분은 더 뚜렷해졌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군사 정권 등을 거치며 이와 같은 문제를 되짚을 겨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 역할 지형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 p.86
모든 범죄는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교육을 통해 예방해야 합니다. 때리지 맙시다. 도둑질하지 맙시다. 안전 운전합시다. 그게 예방 교육입니다. 맞지 않기 위해 조심합시다. 도둑맞지 않도록 합시다. 교통사고 당하지 않게 조심합시다. 이건 예방 교육이 아닙니다.
--- p.140
디지털 성 착취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가 얼마나 도덕적이었는지, 조심성이 있었는지 따져 보는 사회적 시선은 불합리합니다. 피해자를 관찰하고 규제하는 것은 오히려 가해자에게 자유를 주는 행동이니까요. 디지털 성폭력은 기술 발달로 인해 확장되고,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집단으로 발생되는 등 나름의 특성이 있지만 문제 해결의 열쇠는 결국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에 있습니다.
--- p.151
같은 말을 하더라도 어떤 말은 공포스럽고 어떤 말은 공포스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하는 이가 사회적, 구조적으로 가진 권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p.192
성별 고정관념에 의해 약자가 받는 폭력은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 국가, 인종, 종교, 성 정체성 및 성적 지향의 차별과 함께 교차적으로 발생합니다. 이것을 폭력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고 하는데요. 여성은 남성에 의해 차별받지만 여성 중에서도 백인 여성은 유색인 여성에 비해 우월한 대접을 받는다거나,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은 정규직 여성에 비해 성폭력 등에 더욱 취약한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 p.226
우리의 삶은 무수한 인간과 인간의 만남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만남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느냐가 삶의 기쁨과 슬픔, 성장과 퇴보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교육은 궁극적으로 관계 교육이어야 합니다. 더불어 자기 자신이 누구와 어떻게 인생을 그려갈지 설계하는 자기 정체성 교육이기도 하고요.
--- p.230~231
‘김치녀’, ‘한남충’처럼 상대를 비하하는 말을 들으면 세상에는 사랑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은 것처럼 들립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혹시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정보, 상업적인 혐오 팔이에 현혹된 것은 아닐까요?
--- p.233
일상에서 휴식과 평안을 공유하면서 협력하는 존재로서 파트너십을 형성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외로운 존재들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 가족과 출생의 패러다임은 누군가의 봉사와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p.247
사회는 결국 특권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으로 진화할 거예요. 그가 누구이건 그의 지위나 주어진 역할 때문에 권위를 인정받기보다는 인간으로서 신뢰받고 스스로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존중받을 것입니다.
--- p.252
커다란 차별이 아니더라도 그다움이 아니라 여자다움이나 남자다움을 내면화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 아무런 의문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돌담 벽 뒤에서 울던, 그 위로받지 못한 아이에게 바칩니다.
---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