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경신년(1860) 4월에 천하가 분란하고 민심이 어지럽고 각박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할 지경인데 또한 괴상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소문이 있어 세간에 떠들썩했다. 서양인이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 그 조화에 미쳐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고 무기로 공격하되 당할 자가 없으니 중국이 소멸하면 어찌 입술이 없어지는 환란이 없겠는가라는 것이다
--- p.28
교조는 서학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는데 그 서학은 선교의 자유를 얻었고, 반면 동학은 불법화되어 탄압을 받고 있는 상황에 동학 지도자들은 분노했다. 1892년 여름 서장옥徐璋玉과 서병학徐丙鶴이 충청도 공주에서 최초로 교조의 신원伸?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 p.32
동학교단이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농성하고 있을 즈음 인근의 정동 지역에서 외세를 배격하는 격문선전운동이 일어난다. 이를 주도한 것은 남접의 진보 세력일 것으로 추정된다
--- p.35
1860년 동학의 창도 이후 1890년대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 동학교도와 천주교인 사이에 직접적 접촉이나 물리적 충돌은 거의 없었다. 모두 사교로 지목당해 산속에서 피신생활을 했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 p.41
이때(1893) 즉 음력 2월 14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기포드Daniel L. Gifford 학당의 출입문에 기독교 교육을 비난하며 학생들에게 경고하는 격문이 붙었다. 나흘 뒤인 2월 18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J. Jones(趙元時)의 숙소에도 기독교의 종교 교육을 비난하며 선교사들에게 경고하는 격문이 붙었다
--- p.52
격문은 기포드학당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들을 겨냥한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를 패천적인悖天賊人이라 비난하고 천당지옥설을 황당한 주장이라고 비웃는다. 기독교의 미혹한 음사를 버리고,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서책을 불태우라고 학생들을 선동한다
--- p.55
존스는 동학을 한국의 여러 종교의 장점을 종합해 성립된 신흥 민족종교로 파악했다. 여러 장점을 종합하는 성향이 천도교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교리까지 흡수한 것으로 이해했다. 전체적으로는 기독교를 배척하고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천도교가 어설픈 일신론을 수용하고 이웃 사랑의 교리도 지니고 있다고 두 종교의 친연성을 강조했다
--- p.84
캐나다 출신의 매켄지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가 쓴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황해도 장연에서 1894년 양력 10월 10일부터 1895년 7월 23일까지 머물 때 동학군과 직접 접촉했다. …… 황해도 동학군과 매켄지의 접촉은 동학과 기독교, 두 종교 간 소통의 첫 출발이자 대표적인 사례다
--- p.96
기독교를 수용한 사람 중에는 대문에 ‘Worshipper of God’이라는 패를 달았다. 그것이 당시 한문으로 어떻게 표현되었을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경신가敬神家’ 또는 ‘경천가敬天家’라는 번역은 받아들일 만하다. 그렇다면 이는 경천애인, 시천주의 동학과 상통한다. 소래마을 동학군 두목이 기독교인과 동학도인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평가한 것은 이러한 유일신관의 표출이다
--- p.125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이후 …… 봉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동학의 정체성을 숨기면서 서양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운 영학당英學黨이나 불교를 활용한 남학당南學黨과 같은 새로운 조직을 결성한 경우도 있었다
--- p.135
온건개화파 김윤식은 1899년 영학당이 봉기한 것에 대해 “혹은 영학을 칭하고 혹은 서학을 칭하는 자들 수백 명이 취당聚黨했다”고 영학과 서학의 친연성을 강조했다. 영학당 봉기가 실패한 뒤 경상도 진주 등지에 “혹은 동학을 칭하고 혹은 영학을 칭하는 자들이 모여들었다”는 보도는 동학과 영학이 관련 있다는 점을 강조한 시각이다
--- p.161
1899년 영학당이 봉기한 후 영학당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가운데 1900년에도 충청도의 한산ㆍ임천 등지에서 영학당이 다시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성공회 측에서 이를 부인하는 입장을 공식으로 발표한 것이다. 조마가Mark N. Trollope 신부는 차명가탁, 즉 동학이 영학을 가탁했는데 ‘영학’이 ‘영국 교회’로 오해되었다고 무관함을 강조했다
--- p.163
동학여당의 활동은 1900년대 초반에 이르면 한계에 도달한다. …… 3대 교주 손병희는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동학의 이름을 내세워서는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에 이르면 한국에 들어온 서양 종교도 엄정한 조직체계를 갖추어 외부 세력이 침투하여 외피로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p.183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가 지시하여 북접 교단이 조직한 정치단체는 1904년 음력 2월경 서울에서 대동회 결성 시도로 처음 나타났다가 여름 이후 중립회, 진보회가 되고, 12월에 일진회로 통합되었다
--- p.186
진보회는 어디까지나 손병희의 동학교단이 조직하고 지휘한 정치조직이었다. 동학농민전쟁의 진원지인 전북과 충남에서 남접 계열 동학여당의 변혁운동이 소진된 시공간을 대체하면서 문명개화노선으로 전환한 북접 교단의 진보회가 치고 들어온 것이다
--- p.189
문명개화노선으로 전환한 손병희는 천도교를 창건하면서 동학의 과거와 단절을 꾀했다. 1905년 12월 1일 신문에 게재한 천도교 창건 광고문은 ‘천도교 대도주 손병희’의 명의로 나왔으며, 애초에 동학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다. 동학과 단절하려는 의사가 분명하다
--- p.194
최초의 본격적인 천도교단 역사책인 《본교역사》에 정식으로 계승된다. 한문본 《본교역사》에서는 교조신원운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했으나 동학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p.196
1905년 12월 1일 손병희가 신문에 낸 광고에서 첫째 천도교라는 ‘종교’를 창립한다는 것, 둘째 교당을 짓겠다는 것 두 가지를 언급했다
--- p.205
천도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동학 남접의 변혁운동과 결별함으로써 불법화되어 있던 동학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여 근대종교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교리체계의 합리화, 의례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때 근대 서양 종교, 특히 기독교를 표준으로 삼았다
--- p.207
천도교 내적으로 보더라도 후술하듯이 일요일로 정한 시일侍日에 성화회聖化會라는 공개적인 예배의식을 시행하도록 했는데, 전국에 교구를 설정하고 각 면마다 전교실을 마련하고 시일마다 성화회를 열 때 그 장소가 필요했다. 개인의 가옥을 빌려 임시적으로 성화회를 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천도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이 과제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p.209
교리서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은 서양 및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적인 것들이었다. 《천도교종령존안》에서 보면 도인이라 하지 않고 교인으로 쓰면서, 종도, 신도, 입교인, 신입교인 등의 표현도 사용했다. 종래의 도소와 포접 대신 교당 또는 교회, 교구라고 했다. …… 제사에서 성화회로, 가사에서 천덕송으로 변했다
--- p.211
처음에는 신분금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교당 건축비와 일반 재정을 마련했다. 15세 이상의 교인에게 밥 지을 때 각 사람마다 쌀 한 숟갈씩 떼어 납부할 것과, 1개월 중 3일의 수료금手料金을 납부하도록 했다(216
동학의 포덕 방식과 천도교의 포덕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동학은 불법 사교단체로 치부되어 정부의 탄압을 받은 데 반해, 천도교는 근대종교가 되어 합법 공간에서 공개적인 종교의례와 포덕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동학시절 비밀리에 포덕하기 적합한 방법이 ‘연원-연비제淵源-聯臂制’이며, 공개적으로 포덕 활동을 할 수 있을 때 마련된 것이 ‘교구제敎區制’다
--- p.219
1909년 일제 헌병대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의 수는 20만 명을 운위한다고 하며, 그에 비해 천도교인은 약 30만 명, 시천교인은 약 10만 명으로 추산했다. 동학 계열의 교인이 기독교보다 2배 정도 많다고 보았다
--- p.266
천도교의 최린이 나서서 거족적인 독립선언이 될 수 있도록 세력을 규합했다. 그러나 윤치호ㆍ김윤식 등 당시 사회적 명망가들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최린은 최남선을 통해 기독교 측과 접촉했다. 최남선은 친분이 있는 이승훈과 접촉했다. 이승훈은 2월 11일 상경하여 천도교 측과 협의한 후 선천으로 돌아가 양전백ㆍ이명룡ㆍ유여대ㆍ김병조를 만나고, 평양에서 신홍식ㆍ길선주를 만나 동의를 얻었다. 이리하여 천도교와 기독교는 2월 24일 함께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 p.291
천도교는 교주의 결정과 지휘에 따라 대교구와 교구 및 전교실로 이어지는 위계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3ㆍ1운동 초기에 효율적인 운동의 발화가 가능했다. 반면 기독교의 총회나 연회조직은 조선인 지도자와 선교사들을 구성원으로 한 협의체적 조직이었다. 또한 네비우스선교 방법에 의해 도시와 마을에 설립된 개별 교회는 자치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따라서 기독교의 경우 지역 내에서 교회와 학교의 연계구조는 발달했지만 전국적인 지휘체계는 갖추지 못했다
--- p.292
온건한 청원을 원하던 오화영 등 여러 기독교인들은 ‘국민의 자격’을 내세워, 독립선언은 종교 신앙과 무관하며 국민 된 도리로서 불평등한 압제로부터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춘수ㆍ신석구ㆍ박희도 등 감리교 지도자들은 독립선언의 과격화, 종교가 다른 천도교와의 연대 등에 처음에는 우려를 표명했으나, 독립선언은 조선 민족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종교운동이 아닌 점을 분명히 하면서 참여할 수 있었다
--- p.297
1919년 3~4월 평안남북도의 만세시위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거의 다 주도했고, 연대시위도 절반을 확실하게 상회했다.
--- p.302
두 종교의 연대는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성사시키기 위한 차원에서는 잘 진행되었지만, 지방의 현장에서는 종교 또는 교파가 각각 자기 조직을 동원하여 별도로 진행하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만세시위의 현장을 지휘할 조직적 리더십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다만 천도교가 교구와 전교실 조직을 작동시켰다면, 기독교는 학교의 교사와 학생, 병원의 직원을 동원하는 부분에서 조직성을 발휘했다
--- p.345
3·1운동 이후 내세 종교인 기독교는 사회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교정일치敎政一致의 천도교는 사회운동에 매진했지만 그 동력이 떨어지자 종교로서의 소임도 한계를 보였다
--- p.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