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먼저냐, 낮이 먼저냐의 논쟁은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논쟁만큼 끝내기 어려운 논쟁이다. 서양이나 중국은 ‘주야’(晝夜)라 하여 낮이 먼저이고, 서양 역시 day-night라 하여 중국과 같고, 심지어 ‘날’(day)은 낮과 밤을 다 의미한다. 즉, 그들에게서 날(日)과 낮(晝)은 같다. 이 말은 낮에 모든 우선권을 둔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주야’(晝夜)도 우리말로는 ‘밤낮’이 되고 밤낮을 모두 포함하는 ‘날’(日)이란 말은 따로 있다.
태양계가 형성된 과정을 과학적으로 관찰해보면 태양이 등장한 것은 극히 최근에 있었던 일이며, 그 이전에는 흑암이 있었다. 미행성군이 어떻게 접착과정을 거쳐서 행성으로 성장하여 오늘날과 같은 태양이 나타났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1천 개 정도의 모델을 슈퍼컴퓨터로 시뮬레이션(simulation) 작업을 시도해 보기도 하였지만 아직 결론이 나올 단계는 아니다. 지금으로선 미행성이 충돌해서 하나로 합체되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1장 신화와 우주과학」중에서
각 민족문화의 문화목록어가 갖는 카오스적인 의미는 매우 뚜렷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무(無)이다. 혼돈을 무로 표현한 것은 당연시되었으며, 유는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혼동은 알-카오스이고 혼돈은 얼-카오스임을 구별해 둔다. 불교의 무는 혼돈이지 혼동이 아니다. 불교가 말하는 무란 의미 속에 들어 있는 연기설, 중관설, 화엄사상 등은 카오스 이론의 많은 부분과 일치하고 있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 역시 혼돈개념과 일치하며, 노자는 공자가 그것을 인의예지 같은 도덕률로 가시화시키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대도폐이 유인의’(大道廢而有仁義), 즉 “큰 도가 폐하니 인과 의가 생겼다”라고 함으로써 도는 윤리화시킬 수 없다고 한다. 혼돈이론도 역시 혼돈을 합리화시킬 수 없다고 한다. 카오스 이론의 대표적인 몇 가지 이론은 나비효과 혹은 초깃값의 민감성, 끌개현상, 자기상사현상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론들은 놀랍게도 붓다나 노자 같은 동양사상가가 오래 전부터 말해 오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면 한과 카오스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국의 문화목록어를 ‘한’이라고 했다. 한에는 하나(一)와 여럿(多),가운데(中), 같음(同), 어림(或 혹은 混) 등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예 1) 여름하니(열매 많으니, 多), 2) 한 집에(一), 3) 한 밤, 한겨울(中), 4) 한데, 한가지(同), 5) 한 십분(混)
하나의 어휘 속에 담겨 있는 이런 의미들은 과학의 퍼지나 카오스의 의미를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하다. 오랜 문명사 속에서 한국인들은 ‘한’을 체험하면서 카오스적인 지혜를 터득했다. 그리스인들의 로고스는 합리적인 법칙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문화목록어 가운데 가장 비카오스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은 무나 도와 함께 그 함의 속에 카오스적인 의미가 풍부한데, 여기서 하나하나 밝혀 보려고 한다.
---「2장 카오스 청사진 만들기」중에서
인류 문명의 원초적인 애매성은 전 세계적으로 공히 뱀이나 용 같은 파충류로 상징되었다. 우로보로스가 바로 그것이다. 뱀이 자기 입으로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상징 말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우로보로스 상징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보편적인 상징이다. 자기로부터 자기자신이 아직 미분화되어져 있는 카오스적 모호성을 왜 뱀으로 상징화시켰는지 여기서 한번 심도 있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뱀을 가장 원초적인 본능 혹은 힘으로 본 것은 인도의 쿤다리니 요가에서 더욱 뚜렷하다. 쿤다리니 요가에 의하면 인체 내에 있는 에너지는 생식기와 항문이 있는 가장 낮은 층에서부터 머리 정수리까지 7개의 층으로 상승된다. 이러한 단계 하나하나를 ‘차크라’(chakras)라고 한다. 차크라를 단계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태녕, 『요가의 이론과 실천』(서울: 민족사, 1988), 40.
1단계 물라드라 차크라항문, 2단계 스바디스 차크라생식기, 3단계 마니프라 차크라배꼽, 4단계 아나하타 차크라심장, 5단계 비슈다 차크라갑상선, 6단계 아즈나 차크라미간, 7단계 사하스라라 차크라머리와 같다.
---「3장 에덴동산의 잠꼬대 우로보로스층」중에서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노자, 붓다 그리고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같은 예언자들이 모두 이 기간에 태어났다. 그래서 야스퍼스 같은 철학자는 특별히 이 기간을 ‘차축시대’라고 명명했다. 실로 이 기간이 없었더라면 인류 문명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했다고 할 만큼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말기 정신적 자아기인 기원후 1500년대 이후부터 현대까지는 서양에 있어서 비카오스적인 합리적 자아가 그 극치에 도달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인간의 정신적 자아는 합리화를 극단적으로 이상화시키는 그것을 추구하게 된다. 뉴턴-데카르트로 대표되는 서양의 합리적 자아는 비합리적이고 카오스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시켜 버리려고 한다.
전체에 부분을 귀속시키는 환원주의 그리고 정신과 물질, 마음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나누는 합리주의가 등장한다.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은 뉴턴 물리학과 동반관계를 이루면서 소위 뉴턴-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을 만든다. 결국 ‘뉴턴-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은 카오스적인 세계관의 극치를 이루게 된다. 우리 동양에서도 16세기부터 주자학과 그의 성리학이 동양 정신의 합리주의 정신을 고양시킨다.
---「5장 엄마의 고뇌: 엄마의 영광과 고뇌태모층」중에서
바르트에게서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령을 통해 인간을 회심시키며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가는 사건이다. 성례로서 성령세례는 기독교적인 삶의 총괄 개념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시작이며 완성자임을 말한다(히 12:2). 성령 세례는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물세례를 통해서 일회적으로 발생하지만, 칭의-성화-소명의 은혜와 더불어 현재진행형 단어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일어난다. 성령세례는 완료형 단어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항상 시작이며, 미래를 지적하며 전진한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는 것을 의미하며(고후 5:17), 미래와 새로움을 향한 회개와 성장과 전진을 포함한다(KD IV/4:42).
---「6장 문명에 “해 뜨다”」중에서
동양 대다수 사상가는 진화와 퇴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승불교의 경우 ??반야심경??의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色卽空, 空卽色)이라는 사상은 불교가 물질이 곧 정신이요 정신이 곧 물질임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생(生)과 멸(滅)을 같이 보는 것도 진화와 퇴화를 동시에 보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생은 과학적 타락(진화)이고, 멸은 신학적 타락(퇴화)이라 할 수 있다. 생을 진화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멸은 퇴화의 과정이다. 불교는 공(空)에 머물러 버리는 것을 악공(惡空)이라 하여 이를 ‘상주(常住)의 오류’(fallacy of eternalism)라고 했으며, 색에만 머무는 것을 ‘단멸(斷滅)의 오류’(fallacy of annihilationism)라 하여 이것 역시 경계한다. 여기서 상주의 오류란 플라톤의 이데아같이 관념적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오류이고, 단멸의 오류란 그런 것은 없으며 잡다한 개별자만 있다는 오류이다. 불교의 종지는 결국 이 두 오류를 극복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불교가 진화의 오류와 퇴화의 오류 그리고 과학적 타락과 신학적 타락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양의 기독교에서 볼 때 신학자로서 진화를 믿은 사상가는 샤르댕이었다. 샤르댕은 30억 년 전에 잠재적 물질에서부터 낮은 정신이 생겨났으며 이를 ‘심적 내향성’(psychic inwardness)이라고 했다. 이는 물질에 묻어 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로 ‘늒과 넋’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잠재적 물질에서 넋이 나타나자 약 1백만 개의 원자가 핵을 구성하는 유기체로 과립(顆粒)되어 세포가 생겨난다. 이 신경세포가 증식되어 감에 따라서 직관과 지능이 생겨났다. 원인류 속에 있던 넋이 호모 사피엔스에 와서 고등정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전개돼 온 신학적 타락에 대하여 신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샤르댕이 과학적 타락을 주장한다.
---「7장 카오스 해법 모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