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내 이름이 어렵다며 때로는 순홍, 승홍, 승헌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선생님들조차 가끔 틀리게 부르곤 했다. 높을 숭崇과 넓을 홍弘 자가 결합되어 발음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내 이름에 불만을 가지 곤했는데, 후에는 오히려 이름을 지어 주신 할아버지에게 감사했다. 저서나 논문, 문예 작품 등을 발표해도 같은 이름이 없어 혼동될 위험도 없고, 또 생각해 보면 지금 나의 삶을 결정하고 있는 직업에 맞는다고 생각을 하며 이름에 만족한다.
나는 어릴 적에 보잘것없는 아이로 자랐지만, 불편함 속에서도 내 이상은 늘 높고 멀리 있었다. 좀 지나친 이야기 같지만 이미 내 운명은 내 이름에 게시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지금에 와서는 종종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결코 천박하거나 저속한 일이 아니다. 나는 높은(崇) 진리를 널리(弘) 전하는 사명이 내 이름에 상징화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내 삶을 엮어가다, 지금 말년을 맞아가고 있다.
--- 「1장. 만남의 접점에서」중에서
나는 학문과 이상이 상반되거나 서로 이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이상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발로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런 과정에서 학문의 에너지가 이상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을 일장춘몽이라거나 실체와 형체가 없는 허상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일 수 있다. 학문에 대한 매력은 이상에 의해 점화될 수도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이다.
인간에게 꿈이 있다는 것,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이 꿈의 세계를 동경하고 그것을 붙잡아 보려는 욕망의 힘이 이상을 잉태한다는 것은 진리라 하겠다. 인간은 꿈, 이상, 욕망 등과 관계하고 있을 때만 자신의 삶을 엮어가며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문제는 꿈을 꾸기만 하다 깨어나면 그 꿈은 환상이나 환영으로 그칠 가능성이 있지만, 꿈을 이루려는 의지는 이상을 실현하려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이상의 날개를 퍼덕이며 꿈을 찾아 창공 높이 날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2장. 삶의 전환점」중에서
내가 몰트만 교수를 처음 만난 건 튀빙겐에서 첫 학기(SS 1969)를 시작한 지 몇 주 되던 때였다. 5월 초로 기억되는 어느 날 강의가 끝나서 밖으로 나왔는데 비가 약간 뿌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왔으면 강의에 빠졌을 텐데, 아침에는 날만 흐렸는데 비가 내리니 나로서는 비를 맞으며 철학부 강의실로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급하게 걸어가는데 어느 분이 내 곁에 성큼 다가와 우산을 씌워졌다. 쳐다보았더니 몰트만 교수였다.
그는 내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묻고는 한국에서도 신학을 했느냐고 물어 석사까지 했다고 대답을 했더니, 잠시 후 자기 밑에서 공부할 생각은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받고 당황해 망설이다, 지금 볼노우 교수 밑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우선은 철학을 좀 공부하고 싶다는 식으로 얼버무려 대답했다. 이렇게 몰트만 교수와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의 인품이나 학자로서의 몸가짐 등은 참으로 훌륭하다는 말 밖에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는 분이었다.
--- 「3장. 뮌헨-튀빙겐-아헨의 합류」중에서
나에겐 만남이란 추상적이기도 하고 구체적이기도 한 개념으로 다가오지만, 항상 내 존재를 성숙시켜왔던 실체였다. 내가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독일에 와서부터 늘 많은 만남과 관계를 통해 내 삶을 풍요롭고 폭넓게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도 내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여긴다. 뮌헨에서뿐만 아니라 튀빙겐에서도 내 주위에 나와 관계하고 있는 친구가 많다는 것은 내 의지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억지로 시도한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런 것을 나는 내게 내려진 숙명, 혹은 운명이라고 여길 때도 있다.
--- 「5장. 만남의 여운」중에서
학생들은 나를 많이 따랐다. 진심을 드러내는 표현방식은 남녀학생 간에 차이가 있지만 하나같이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눈빛은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 제자들이 대학교 총장, 목회자, 목사 사모, 여자 목사, 교수, 교사, 총회 기관 중책 임원, 외국 선교사, 환경운동가 등등 다양한 직종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와 교회를 위해 크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제자를 사랑했고 키워왔던 교수로서의 내 삶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요즘도 만나 뵙고 싶다는 연락을 자주 받는데 그럴 적마다 나는 고마움과 보고 싶은 마음이 일곤 하지만, 한창 바쁘게 일할 텐데 부담이 될 것 같이 다음에 시간 내자며 얼버무리곤 한다.
--- 「7장. 철학과 신학, 그 여정의 교수」중에서
나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나의 작품들과 원고들을 정리해 놓고 가고 싶다. 그 준비 과정에서 이미 종교학을 정리해 출판했고, 나의 신학(상, 하권)을 정립해 출판했으며, 틈틈이 써 왔던 시를 엮어 이미 시집 두 권을 출판했다. 지금도 시집 두 권 이상의 분량에 해당하는 작품이 원고 상태로 저장되어 있다. 그중에는 대학 시절인, 1960년대에 창작한 시도 수십 편 있다.
나는 영결의 시간에 가족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제자들, 친구들, 동료들과 신학계, 철학계, 기독교 교육학계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인물로 기억되고 싶다. 내겐 이렇게 헤어짐이 아름다운 이별이며, 위대한 시간이다.
이 회고록을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친다.
--- 「12장. 많은 만남, 그러나 영원한 고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