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남편의 양복을 입고 사라지기 전까지, 27일간 이 집에서 둘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지냈던가를 생각한 탓이리라. 도대체 남자들이란 어쩌면 그렇게 훌쩍 떠나버릴 수가 있는 건지, 그는 한 달 만에 밖으로 나가 완전히 딴 세상이 된 시내를 돌아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어김없이 그녀는 수치심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가 한 번만 연락해 주기를 기다렸고, 그러면 모든 일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고, 그러다가 이 어두컴컴한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이었다. 철퍼덕.
그녀는 털썩 계단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고, 토미는 어쩔 줄 몰라 달래려고 애를 쓰는데, 그에게 어찌 다 설명하랴. 어느새 드문드문 새치가 생겼고 이제 얼마 안 가 백발이 될 텐데, 브레머와 함께 지낸 그 날들 말고는, 수년의 세월이 흔적도 자취도 없이 허망하게 그저 흘러 사라져 버렸다는 걸.
그녀의 삶에서 빼 버려도 거의 티가 나지 않을 한 시기였다. 아주 짧은 기간, 단 며칠에 불과했는데, 그러나 이로써 그녀의 삶에서 무엇인가가 완전히 종결지어졌다. 젊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더는 젊은 나이가 아닌지 오래였으니까, 아니 그보다, 이제 비로소 본격적으로 늙어가는 거겠지. --- 본문 중에서
레나는 브레머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잡혀 들어가, 독가스에 질식사하고 불에 타 죽었대. 너무 기가 막혀. 죽음의 공장들이 있었다는 거야. 꾸며낸 얘기야, 전부 다 헛소문이야, 브레머가 말했다. 적군의 선전공작이야. 그런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릴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야 러시아 놈들이지. 바로 그다음에 그가 한 말이 레나 브뤼커를 마침내 완전히 폭발시켰다. 브뤼커 아주머니는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 뜨개질감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내 시선을 약간 비켜 허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제 브레슬라우가 탈환되었느냐고 물었던 거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에게 악을 썼다. 아니. 그곳은 이미 잿더미가 됐어! 벌써 오래전에. 완전히 끝났어. 알아듣겠어? 다 끝났다고. 한트케라는 대관구장은 줄행랑을 놓았지. 피셀러 슈토어크를 타고 날랐다고. 그놈은 정말 대단한 개자식이야, 거기다 대면 프뢰리히 박사는 조무래기 개자식이지. 전부 다 개자식들이야. 제복 입은 것들은 죄다 개자식들이라고. 빌어먹을 전쟁놀이 타령을 일삼는 당신도. 전쟁은 끝났어. 알아듣겠어? 끝났다고. 벌써 진즉에. 끝장이야. 다 끝났어. 악살박살이야. 우리가 졌어, 완전히 졌어. 그래, 천만다행이지.
그가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데,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당황한 빛도 아니고, 그렇다고 의심하는 기색도 아니었고, 그냥, 멍했지. 나는 비옷을 꺼내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어.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