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뿌리편
1. 함흥차사 해결한 이백(李伯) 할배
개요(槪要)
1398년경 이태조는 옥쇄를 간직하고 고향인 함흥궁궐에 있었다. 이태조를 한양 조정으로 모셔오는 과정에 일어난 행위가 ‘상왕을 짐승에 비유했다’는 죄목이 되었다.
조정 근심을 해결하고도 영덕에서 함흥으로 쫓겨 가야만 했던 엄연한 역사적 진실은 과거 속에 묻혀 있었다. 참혹했던 역사를 새롭게 들추어 진실성을 알리고자 족보 인(人) 말미(末尾)에 유사록(有司錄) 원문을 싣는다.
‘단종 복위 모의’ 발각으로 금성대군과 함께 영주 순흥부사 영천이씨 보흠(甫欽)이 참수(세조 3년-1457)되고 가솔들은 노비로 전락 되었다.
숙종(1674~1720) 때 복권되기까지 300여 년간 노비로 전락 되는 바람에 영천이씨 집안 조상 내력 문서도 불확실해졌다.
1765년 예조정랑 이창례(李昌禮-입북 판서공 영덕이씨 11세손)가 지참한, 관북 가승보(家乘譜)에 의해서 선세계보(先世系譜)와 각파의 계보가 고증되었다.
■ 입북(入北) 영천이씨 족보 발행-판서공파관북(關北) [가승보(家乘譜)]-1539년
■ 예조정랑(繡衣之行-李昌禮, 판서공 11세) 지참 [선세계보] 고증- 1765년
■ 관북보(關北譜) 선대(先代) 계보 정확도 확인 [갑자대동보] 발행- 1924년
■ 영천이씨 대종회(02.736.0202) [영천이씨 유적총람] 발행-2009년
(참고: 문경문원 9집, 2019 발행, 영천이씨 족보, 100p)
1) 입북시조(入北始祖) 이백(李伯) 족보
‘입북(入北) 영천이씨 족보’는 천(天), 지(地), 인(人), 3권으로 나누어 있다.
함흥차사(咸興差使) 사건(1398년경)을 해결한 후, 영덕에 살던 이백(李 伯)은 태조(이성계) 고향 함흥으로 살림집을 옮겼다.
영천이씨(永川李氏)에서 영덕이씨(盈德李氏)로 관향(貫鄕-본적)을 바꾸었다. 성조(聖祖) 개국 초(開國 初) 원종공신(從從功臣) 공조판서(工曺判書) 겸(兼) 도제조(都提調) 휘(諱) 이백공(李伯公) 집안 내력이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2. 1985 고등법원 항소
1) 함정
-거절 못한 인정
영하 15도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밤 동두천행 막차 버스를 탄 것은,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 둘째 오라비 주변에 무언가 음모가 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 차창 밖을 내다보며 구치소에서,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을 오라비를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40여 년 전 일이다. 1947년 12월 하순, 그날 밤은 하늘에서 눈덩이가 쏟아붓듯 내렸다. 둘째 오라비와 나는 어머니를 따라 보초병을 피해 산길로 접어들었다. 빼곡히 들어선 아름 들이 참나무 시커먼 등걸을 보고 어머니는 보초병인가 싶어 놀라곤 하였다. 먼저 남하한 아버지를 찾아 삼팔선을 넘던 길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면서 장진면 신하리 산골 마을을 버리고, 우리 가족은 장진에서 하갈이 고토리를 지나 큰집이 있는 함흥으로 이사를 했다.
집안 장손은 단원을 모아 공산당 반체제 운동을 시작했다. 서른한살 아버지는 비밀요원을 피해 도망치듯 함흥을 떠났다.
어머니가 생계수단으로 큰집 과수원 자두를 광주리에 이고 함흥 만시게다리 근처에서 파는 것을, 비밀요원은 ‘남조선에서 도망친 가족이 파는 물건이다’라며 빼앗아 사람들한테 나눠 주었다.
젖먹이 아기가 홍역을 앓는데도 ‘반동분자 가족’이라며 여름 뙤약볕 강제 노역을 시켜 아기를 잃게 했다.
당시에는 삼팔선을 몰래 넘나드는 물물교환 상인들이 있었다. 연천 쪽 접경지대 댐 공사장에 취업한 아버지는 상인들과 교분을 쌓았고, 함흥으로 기별을 보낸 것이다. 비밀요원들은 상인들 속옷과 양말까지 벗기며 북조선 탈출자를 캐려고 조사를 했다.
아버지는 상인 옷고름 속에 증명사진을 증표로 넣고 기별을 보냈다. 아버지 사진을 받은 어머니는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갈 테니 그곳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당시 열두 살 큰오라비는 홍원 큰고모 댁 소몰이꾼으로 숨어 있었다. 아침에 주먹밥과 물통을 허리춤에 매달고 소 등에 함께 묶인 채, 소를 모는 소년들이 십수 명이라 했다.
5. 백일기도 인연
나는 조계사 큰 법당에서 총무원장 스님의 저녁 법문을 듣게 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정확한 목표를 세워 봐! 목숨 내놓고 죽을 힘 다해 노력해 봐! 안되는 게 없어! 그것도 못 하겠으면 당장 죽어삐리.”
1980년 중반 창충동에서 복덕방 직원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복덕방 직원’으로 미래 세 아이 대학 학자금은 어림없었기에 어떤 묘수가 있을까 하여 퇴근 시간 ‘거사 불자회’에 참석하였다.
큰스님의 우렁찬 고함이 마치 내게 내려치는 몽둥이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백일기도를 올리기로 하였다. 오늘도 내일도 일과를 마치면 조계사 큰 법당 부처님 전에 ‘지혜와 방법’을 찾았다. 100일 동안 세 아이 도시락은 물론 식탁에도 고기와 달걀을 금했다.
100일 회향하는 날 꿈을 꾸었다. 오십만 원 보증금에 오만 원 사글세방, 쪽마루에 냉장고를 놓고 부엌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쪽마루에 올려진 냉장고가 마당으로 넘어졌다.
“아이고, 냉장고 안에 보물 들었는데.”
“네? 보물요?”
힘센 장정 두 명이 넘어진 냉장고 좌우에 엎드려 안을 살펴보더니,
“보물? 그냥 있는데요.”
그 후 나는 복덕방을 정리하고 염주 장사를 하게 되었다. 우연히 벽조목(霹棗木) 염주를 각 사찰에 납품하면서 세 아이를 대학에 보내게 되었다.
중국산 가짜 벽조목 염주가 난립하면서 무량사 주지 스님은 염주 공장을 중단하였다. 단골로 수년간 거래한 노장 비구니 큰스님은 ‘백일기도’를 시작하면 두 달쯤 지나서 새로운 제품이 나타난다고 했다.
스님의 예언대로 두 달 지나서 조계사 총무원 경비 하 실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마침 총무원 강당에 ‘불교 미술전’이 열리고 ‘도실(桃實-개복숭아) 염주’가 전시되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