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햇빛이 창문에서 비쳐 들어오는 시각.
“와, 드디어 깼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PC 모니터 앞에서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트리플 킹
덤’. 조금 전까지 청년, 김진현이 하고 있던 게임이다.
트리플 킹덤은 삼국지를 모티브로 한 판타지 전략 시뮬레이
션 게임으로, 영주가 되어 대륙 통일을 하는 게 목표다.
게임의 배경은 판타지 요소가 들어간 서양 봉건시대였다.
비록 멀티 플레이가 되지 않는 오프라인 게임이지만 굉장히 높은 자유도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영주들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플레이할 수 있었으니까.
그 외에 게임 밸런스를 지키는 선에서 유저가 직접 신무장들을 만들어 등록시킬 수 있으며, 이는 아이템도 마찬가지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트리플 킹덤 유저들이 직접 제작한 모드(Mod)도 적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현은 다양한 영주들을 선택해서 게임을 플레이해 왔으며, 방금 전 백 번째 천하 통일 엔딩을 봤다.
그것도 최하급 시골 영주 다리안으로.
“다리안으로 엔딩을 본 건 내가 최초일 것 같은데.”
변경의 시골 영주 다리안.
삼국지의 엄백호 같은 인물로, 문관이나 무관으로서의 능력은 평범 이하였고 영주로서의 능력도 밑바닥이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영주 중에서 첫 시작이 가장 어려우며 게임 초반부터 개복치처럼 쉽게 죽어 나가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진현은 다리안으로 천하 통일을 이루어 냈다.
“역시 게임은 어려워야 재밌는 법이지.”
어려운 난이도의 게임을 공략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달성감과 성취감, 그리고 이어지는 달콤한 보상까지!
“세상이 게임 같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진현은 현실에서 노력한 만큼 인정받거나 보상받지 못했다.
명문 대학에서 고학점을 유지하며 졸업했고, 토익 및 토플 점수도 고득점을 받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열 개가 넘는 자격증까지 따 냈다.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참아 가며 노력한 끝에 이룬 성취였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는가?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것을.
갑작스럽게 인맥과 혈연 같은 백으로 끼어든 낙하산들 때문에 목표로 했던 회사에서 어이없게 퇴짜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게임은 달랐다.
게임에서는 노력한 만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고, 보상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골 영주 다리안으로 천하 통일이라는 패업을 이룰 수 없었을 테니까.
띠링.
“어?”
순간 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게임 엔딩 마지막 화면에서 갑자기 알람 소리가 울리더니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김진현 플레이어님. 진현 님께서는 최초로 기본 영주 100명으로 트리플 킹덤 세계를 정복하셨습니다. 특히 다리안 군주로 세계를 정복하시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진현 님에게 기회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뭐야, 이거?”
갑작스럽게 떠오른 게임 속 메시지. 발신자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 섬뜩한 사실이 있었다.
‘이거 분명 오프라인 게임일 텐데 어떻게 메시지가 오지? 그리고 내 이름은 또 어떻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PC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트리플 킹덤은 오프라인 게임이다.
메시지 기능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시지 발신인은 진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임은 직접 오프라인 매장에서 현금을 주고 샀으며, 게임 속에서 실명을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김진현 플레이어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노력한 만큼 보상받고, 감동과 스릴이 넘치는 즐거운 세상! 새로운 트리플 킹덤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하겠습니다.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Yes Or Yes.]
“미친.”
모니터에 떠오른 메시지를 본 진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무슨 답정너도 아니고 한 가지밖에 없었으니까.
진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메시지를 바라봤다.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프라인 게임에서 실시간 메시지가 날아오질 않나, 더욱이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력한 만큼 보상이라…….’
현실에서 진현이 바라 왔던 것.
그걸 미끼로 초대 메시지를 보냈다.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초대에 응해 주신다면 무료로 대규모 신버전 DLC 파일을 업데이트해 드리겠습니다.]
“뭐? 신버전 DLC 파일이라고?”
진현은 솔깃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바라봤다. DLC, 즉 다운로드 가능한 대규모 신버전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진현은 트리플 킹덤 게임의 열렬한 팬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더 게임에 빠져들었다.
한 판 한 판 하다 보니 어느덧 100판이나 플레이했으니까.
“신버전이라는데 이거 안 할 수도 없고.”
이미 기존 버전은 전부 공략을 완료한 상황.
새로운 버전의 게임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어떤 콘텐츠가 추가되어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까짓것 지르지 뭐.”
문제가 생겨 봐야 컴퓨터만 맛이 갈 뿐이다.
최악의 경우 해킹이나 바이러스에 걸리는 것 정도일 터.
그렇다면 하드를 포맷하면 될 문제였다.
안 그래도 PC 성능이 좋지 않아서 새로 한 대 뽑을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이번 기회에 새로 한 대 맞추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음을 굳힌 진현은 마우스를 움직여 Yes를 클릭했다.
딸깍.
번쩍! 화아아아악!
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하얀 빛이 PC 모니터에서 터져 나오며 그대로 진현을 삼켰다.
“……!”
하얗게 명멸하는 빛 속에서 진현의 의식은 멀어져 갔다.
그리고 정신을 잃기 전, 진현의 머릿속으로 마지막 메시지들이 각인되듯 새겨졌다.
[신버전 DLC 파일 업데이트를 확인! 현실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당신은 모든 영주로 천하 통일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에픽 미션의 난이도가 불가능으로 설정됩니다. 불가능 난이도로 인해 여러 가지 제약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업데이트된 DLC 파일에서 트리플 킹덤 PK3 버전이 적용됩니다.]
[시공의 전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
“나이젤 대장님, 아침점호 시간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진현은 불현듯 눈을 떴다.
“큭!”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두통이 찾아옴과 동시에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에서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숙취가 올라온 것이다. 그 탓에 진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목이 타 들어가는 듯한 갈증까지 느껴졌다.
“무, 물…….”
“여기 있습니다.”
진현의 중얼거림에 누군가가 수통을 내밀었다.
진현은 수통 뚜껑을 열고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그 순간.
“풉!”
진현은 자신에게 수통을 건네준 자의 얼굴에 한바탕 물을 내뿜었다.
“아, 씨! 뭐야, 이거? 술이잖아!”
정정한다.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술을 한차례 내뿜은 진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숙취와 잠에 취해 둔해져 있던 감각과 의식이 되살아났다.
‘어?’
순간 진현은 깨달았다, 천막 안에서 20대 사내들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미묘한 긴장감이 막사 내부를 감돌았다.
‘뭐야? 여긴 어디야?’
진현은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
“죄, 죄송합니다!”
쾅!
진현의 앞에 있던 인물이 머리를 땅에 박고 손을 허리 뒤에 갖다 대며 엎드려뻗쳤다.
“으윽!”
또다시 머리 전체를 마구잡이로 헤집는 두통이 엄습해 왔다.
눈앞에 있는 인물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골이 울린 것도 있지만 때마침 생소한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치 주마등처럼 진현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
[십인대 대장 나이젤의 기억과 동기화를 완료하였습니다!]
[김진현 플레이어님의 특전으로 S급 고유 능력 2개가 생성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포텐셜(S)의 효과로 십부장 나이젤의 잠재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진현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후 서서히 고통이 잦아들고 의식이 또렷해졌다.
그와 함께 동기화를 완료한 십인장 나이젤의 기억이 진현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 덕분에 진현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십부장 나이젤이라고?’
진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놀랍게도 이곳은 트리플 킹덤 속 세상이었다.
마우스 클릭 한 번 잘못했다가 졸지에 게임 속 세계에서 눈을 뜬 것이다.
그것도 십부장 나이젤이라는 엑스트라 인물로.
“나이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그러게 어제 술 좀 적당히 마시지 말입니다.”
굳어 있는 사내들 중에서 훈훈한 인상의 청년이 넉살 좋게 말을 걸며 다가왔다.
딜런, 십인대 부대장.
진현은 동기화된 나이젤의 기억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지금 상황부터 넘기자. 생각은 나중이다.’
눈을 뜨니 게임 속 엑스트라가 되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지금 상황부터 넘겨야 될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이놈은 뭐냐?”
진현은 눈앞에서 엎드려뻗쳐 있는 인물을 내려다봤다.
“어제 새로 들어온 신병 아닙니까? 얘가 그래도 신병들 중에서는 나름 정예 신병입니다. 실수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정예 신병이라고?”
물을 달랬더니 술을 가져온 놈이 정예 신병이라니!
“정예 신병은 무슨, 병신 예정이겠지.”
신랄한 진현의 말에 신병, 트론은 억울한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게 왜 술을 가져… 어?’
문득 어젯밤 나이젤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달라고 하면 보급품으로 받은 술을 가져오라고 트론에게 명령을 내린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대체 얼마나 술을 좋아하면 숙취를 술로 해결하려 한 걸까.
속으로 한차례 혀를 찬 진현은 트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됐으니까 그만 일어나라.”
그 말에 점호 준비 중이던 병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나이젤이라면 이렇게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으니까.
막사 안이 뒤집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뭘 봐, 이것들아. 점호 시간이라며? 빨리 준비 안 하냐?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
“예, 알겠습니다!”
역시나 평소와 다름없는 나이젤의 서슬 퍼런 눈빛에 사내들은 화들짝 놀라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대에서 군대를 전역하고, 머릿속에 새겨진 나이젤의 기억 덕분에 평소 나이젤의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것이다.
“너도 가 봐.”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진현은 귀찮은 파리 쫓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그리고.”
진현은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트론을 멈춰 세웠다.
“물 좀 가져와라. 시원한 걸로.”
아무래도 냉수 마시고 속 좀 차려야 할 것 같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