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기의 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물음은 결코 쉽지 않다. 흔히 박현기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비디오를 예술작품으로 끌어들인 선구자라는 수식이 지배적이다. 1970년대 말 그 어렵던 시절에 스스로 돈을 벌어 영상기기와 모니터를 구입하고, 모니터와 돌이 함께 있는 설치작품을 시작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일이다.
모니터는 그저 일종의 ‘방편’으로서, 인류의 오랜 질문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금 일깨우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질문이란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실재와 허상에 관한 오랜 논의로, 호접몽(胡蝶夢)을 꾸고 난 후 무엇이 현실인지 꿈인지, 내가 인간인지 나비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던 장자의 정신세계를 떠올리는 것이다. 무엇이 실재하는 돌이며, 무엇이 허상인가? 만약 영상의 돌이 허상이라면, 실재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 돌은 과연 진짜일까?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박현기 1942-2000 만다라]전을 기획하며, II.박현기의 작품: 현현(顯現)에서 만다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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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기의 작업노트에 보면 이런 구절이 보이는데 당시 비디오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대부분의 예술가들의 처지를 반영해 주고 있지 않은가 본다. “나에게 테크놀로지한 경험과 체험, 그러한 환경이 없었기에 그를(아마도 백남준을 지칭 하는 듯) 추종할 수 없었고 그와 반대급부에서 탈테크놀로지한 장르를 지향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중략) 그때는 막연했지만 마음 뿌듯한 자신감으로 테크놀로지가 아닌 쪽으로 전력 투구해갔다.” 그러니까 이 말은 박현기의 작업이 백남준으로 맥락되는 비디오아트 일반의 길과는 다르다란 것이고 그것이 다른 형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저간의 사정을 함의하고 있다. 박현기를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순수 국산 비디오 아티스트”로 위상지우는 것도 이에 말미암는다. 화려한 각광을 받고 등장한 백남준과는 달리 비록 그의 출현이 초라할지라도 순수한 국산이란 데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광수(미술평론가), 「01 박현기를 기억하며, 박현기의 비디오 아트」
--- p.288
그가 78년경부터 들고나온 비데오 作業(작업)은 70년대 한국 현대미술에 또 하나의 영역을 상존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흐르는 강물 위에 세워둔 거울, 거울에 비친 강물의 흐름, 그리고 거울과 강물이 비데오 화면에 잡혀 지속적인 흐름 상태가 연결되는 작업(1979). 비데오 4개의 화면이 이어지면서 강물에 파문을 주고 있는 막대기와 그 파문의 운동이 4개의 화면에 번져 나가는 작업(1979). 이것들은 전파매체의 조작으로 비데오에 나타나는 像(상)의 변화, 음악 등의 변화를 타고 예민한 테크놀러지의 세계를 구사하는 양태와는 달리 그대로 지속하고 있는 사물의 객관화에 촛점이 모아질 수 있으며, 이때 화면에 나타난 像(상)은 像(상)자체를 응시케 하는 窓口(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즉 들여다 보면서 「들여다 보는」자체를 思考(사고)케 한다. 이렇게 사물의 영상화, 그리고 그 영상의 자연스러운 지속 속에서 사물의 측면을 찌르는 투명성이 탄생한다. 그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계도 아니며 즐거운 이야기나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지속하고 있는 세계,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겨우 감지케 할 따름이다.
장석원(작가), 「02 박현기를 기억하며, 비디오 인스탈레이션의 현장화, 박현기의 「Media as Translators」전의 현장을 찾아」
--- p.293
더욱 근자에는 어두운 방, 식탁 테이블 위 접시에 영상을 먹으라고 내놓았다. 거기에는 전쟁의 상흔, 혹은 만다라 같은 영상 그리고 천변만화하는 티벳 밀교의 불화 등 그의 작업은 상당한 변화를 보인 것이다. 이제는 서서히 세상 속에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려는, 인생을 바라 보려는 변화, 질주해 왔던 예술가가, 예술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가 변화를 보였다. 예술이 과연 어떤 것이었던가? 예술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듯 이전에 예상할 수 없었던 관조적인 태도가 물씬 묻어나왔다. 이 무슨 변화인가. 그도 나이를 먹었나. 아니, 예술을 통해서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달관의 초입까지 갔는지도 모른다. 자랑스런 현기, 뚝심 깊은 그, 사노라면 온갖 복잡한 일들이 많아서 우리 평범한 인생들은 도무지 시끄런 일들이 많다. 예술가로서의 현기는 야망이 있었고, 꾸준했고, 조심스럽기도 했고, 용기있었다. 그리고 인생을 예술로 바꿀 수 있었다.
이강소 (작가), 「03 박현기를 기억하며, 내 기억 속의 박현기」
--- p.295~296
박현기의 이른 죽음과 아쉬운 많은 일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한국-대구발(發) 첨단 기술의 비디오 아트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동영상 편집 툴인 디렉터프로그램으로 기억된다. 그것이 일본에 출시되는 날에 맞춰 오사카 전시 설치 및 취재를 겸해 박현기 등과 일본행을 했고, 긴 줄 서서 프로그램을 사서 돌아와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제 다 죽었어” 라며 어린아이 마냥 좋아하던 그가 보고 싶다. 나는 그의 노력을 남을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번 전시가 남다른 것은 곳곳에서 그의 숨겨진 노력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박현기의 작업에 숨어있는 그만의 비례와 리듬은 침착한 파도처럼 오히려 날 위로한다. 그것은 옛날보다 더 차분 하고 설득력 있다. 박현기의 전성기 작업들은 장희덕의 공조와 함께 한 것이다.
신용덕 (미술평론가), 「04 박현기를 기억하며, 박현기와 함께 한 이들」
--- p.297~298
60년대 중반 대학시절 방학마다 우리 집안의 여든이 되신 어른을 만나 뵙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작업에도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재실에 있는 추사 현판도 보고 고서화도 구경하면서, 어른과 나눈 대화는 우리 문화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 어른은 박현기 선생에게 잊지 못할 은인이었다고도 회고하였다. 사랑방 앞 작은 정원에는 오죽(烏竹)이 심겨있고 수석을 모아 즐기신 어른이 나와 어떤관계이며 집안의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 하시며 물으셨다.
문희목 (대구 남평문씨 세거지), 「05 박현기를 기억하며, 박현기와 광거당의 인연」
--- p.300
대구에 있는 그의 산소에 가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마치 본인을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품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 목소리가 들리고 에피소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두근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1980년대 우리는 일년에 4~5번은 대구, 오사카 에서 만나고 있었다. 그에 대하여 쓰고 싶은 것은 너무 많지만, 오늘은 마음을 가라 앉히고 ‘담백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1993년에 출판한 에세이 「바람 사이의 친구들(風の間の仲間)」에서 박현기와의 접점 부분을 발췌해 간단하게 쓰고, 이것이 그의 만다라 세계의 일부가 되었으면 한다.
오쿠보 에이지 (大久保英治, 작가), 「06 박현기를 기억하며, 박현기에 대한 기억」
--- p.302
박현기는 일본과 한국의 문화를 온전히 비교할 수 있는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많은 한국적인 성격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기를 바라면서(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것이 세계적인 위치로 변해가기를 바라면서), 작품 전개의 다양한 계획을 생각했을 것이고, 골동이라는 개념도 그 방향을 향한 주요한 장치로 선택했을 것이다. 실제로, 대구 달성군에 있는 광거당 (廣居堂-대구 달성군 화원 인흥마을, 남평문씨 세거지에 있는 아주 아름다운 전통한옥. 우리나라 에서는 보기 드문 계획된 마을 구조, 건축물들 중 하나. 추사의 현판도 있다)에서 풍성한 한국전통 문물에 관한 개안을 했을 것이며, 문중 장손인 문희목과도 각별한 교류를 오랫동안 유지해 오면서 전통과 현대의 촘촘한 관계망을 만들어 내려고 했을 것이다.
문범 (작가), 「07 박현기를 기억하며, 박현기 소묘(素描)...2015」
--- p.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