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갈비에서 삐삐알바까지
대학을 진학하면서 부모님의 도움은 모두 끊겨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등록금은 부모님께서 주셨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지금도 있는 연대 앞 ‘형제갈비’에서 갈비탕 서빙을 했다. 갈비탕 네 그릇을 점심시간 내내 서빙하다 보면 등은 땀으로 젖고, 다음 날 학교에서 펜을 잡고 수업을 듣기 어려울 정도로 팔이 아팠다. 나는 그 희생의 대가로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었고, 당시 유행했던 고가의 스톰 브랜드 떡볶이코트도 샀다. 친구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나로서는 갈비탕 서빙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기에는 시간적인 어려움이 컸다. 갈비탕 아르바이트로 다른 친구들에 비해 큰돈을 벌어 본 나는 더 이상 돈을 적게 주는 아르바이트는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아르바이트는 전단지를 돌리는 일이었다. 아침잠이 너무 많은 나에게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주어진 분량만 채우면 약속한 돈을 받고 나머지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1,000장, 2,000장을 정해진 구역에 뿌리기만 하면 되는 전단지 아르바이트는 나에게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물론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전단지 아르바이트가 갈비탕 아르바이트보다 유리했다. (...)
하지만 아르바이트가 없이는 하루도 생활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찾은 아르바이트는 지하철역 앞에서 작은 파라솔과 테이블을 깔고 ‘삐삐’를 파는 일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핸드폰 개통 아르바이트 정도라고 이해하면 쉬울 듯하다. 시간당 기본 수당이 있었고, 핸드폰 한 개를 개통할 때마다 인센티브가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일한 것에 대한 성과, 즉 인센티브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내 인생의 첫 세일즈였다. (...)
겨울엔 종일 얼굴이 얼어있다 녹으니 겨울 내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갰다. 삐삐를 팔던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졌다. 내 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삐삐를 젖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물건을 챙기느라 나는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다. 하얀 면 티를 입고 있었는데 그 지경이 되었으니 얼마나 흉하고 우스꽝스러웠을지 상상을 해보라. 나에게 아르바이트를 준 점주도 당시 고가인 삐삐가물에 젖으면 낭패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서둘러서 현장에 도착했는데 내가 흠뻑 젖은 것을 보고도 첫마디가 “물건은?”이라고 물었다. 물건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내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정말 고맙다고 하며 당시 인센티브와 기본 수당 외에 ‘만 원’을 더 지급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비에 젖었지만 보너스로 받은 ‘만 원’이 나의 모든 수고를 잊게 했다. 삐삐 알바는 나에게 세일즈 맛을 느끼게 해준 엄청난 계기가 되었다.
“시도하지 않는 곳에 성공이 있었던 예는 결코 없다.” (_ 윤기주)
--- p.17~21
생존을 위해, 지인을 넘어서다
고객이 없었다. 2010년 입사해서 꼬박 3년을 거의 지인 위주로 영업을 했다. 내가 지인시장에서 그나마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건 꾸준한 활동량과 더불어, 진심으로 고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통했기 때문인 것 같다.
보험을 시작하면서 바로, 당시 국내에서 막 뜨고 있는 SNS인 Facebook을 시작했다. 아주 소소하지만 메시지가 있는 나의 일상도 올리면서, 내가 보험 세일즈를 열심히 하는 사람임을 끊임없이 각인시켰다. 페이스북 친구가 처음 500명이었으니 나를 아는 사람 500명에게는 꾸준히 내가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주로 올리는 메시지는 사람들이 식상해하는 보험정보나 광고가 아니라 본인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있는 선물 이벤트가 중심이었다. “예쁜 돗자리 보내드립니다! 한정수량이라 신청하신 30명만 보내드립니다! 댓글로 신청해주세요!”이런 이벤트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로 올린 지 몇 시간이 안 되서 마감되었다. (...)
지인시장에서 3년간 영업을 하면서 꾸준히 2W를 했으니 계약할 수 있는 지인은 거의 다 계약을 했고, 더 이상 새롭게 만나서 계약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주위 동료들은 지인만을 상대로 보험영업을 3년씩 하면서, 2W를 한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 인생 잘 살았다며 나를 모두 대단하게 칭찬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찾아갈 지인이 없는 상황이 되면서 두려움에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3년 2W는 보험 계약으로 300건을 해야 하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그 많은 계약을 했는지 나도 신기할 정도다. 아마도 지인만으로 300건 계약이 가능했던 원천은 나의 가장 큰 장점인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호응하고,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타고난 본성이었던 것 같다.
2010년 11월 입사해서 연간 실제소득이 2011년은 5,700만 원, 2012년은 6,900만 원, 2013년은 1억 500만 원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일을 시작하고 3년이 되는 시점부터는 부동산 중개업을 할 때의 소득을 뛰어넘게 되었다. 내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지만, 더 이상 보험이야기를 같이 할 수 있는 고객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은 두려움이 최대의적인데 그 두려움으로 인해 즐겁고 행복했던 활동이 갈수록 힘들어지기만 했다. (...)
지인을 넘어서 교보생명 평생든든 서비스로 계약한 첫 경험이 지금까지 나를 희망과 즐거움으로 이 일을 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긴 역사를 가진 교보생명이다 보니 고객분들 중에는 20년 전 상품을 유지하고 있는 분들도 있고, 때로는 더 오래된 상품을 유지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첫 계약을 해보고 나니, 더 많은 고객에게 평생든든 서비스를 하고 싶은 마음에 회사에서 주력으로 판매했던 전 상품을 꼼꼼히 공부했다.
나를 아는 지인을 만나서 약간의 프리미엄을 가지거나 친분을 활용해 계약을 할 때와,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고객을 만나서 내가 알고 있는 보험 정보를 드리고 고객이 거기에 동의하고 계약을 할 때 느끼는 성취감의 차이는 차원이 달랐다. 어느덧 보험영업에 내 혼을 담아가며 진정한 보험 전문가가 되고 있었다.
“세일즈는 거절당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_야마모토 후지마쓰)
--- p.7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