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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1912~1945 세트

김일성 1912~1945 세트

[ 전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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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8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853쪽 | 4852g | 180*230*158mm
ISBN13 9791189809300
ISBN10 1189809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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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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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 | 성장과 시련

1912년 4월, 김성주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기독교 신자 김형직과 아내 강반석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김형직은 장일환이 조직한 조선국민회의 핵심 멤버로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18년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김형직은 직업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조직 복구를 위해 애쓰던 중 오동진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았다.
1920년 김형직 일가는 망명길에 올랐으며 중강진에서 순천의원을 열고 엄청 많은 돈을 벌어 처남 강진석이 활동하던 백산무사단 등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했고, 그의 집은 백산무사단의 거점이 되었다. 1922년 강진석이 체포되자 김형직 가족은 중국 장백현 팔도구로 이전하여 광제의원을 열었다. 그곳에서 김형직은 오동진이 총영장을 맡았던 광복군총영의 활동을 지원하고 포평의 광복군총영 무기고를 담당했다. 1923년 김성주는 혼자 평양으로 떠나 외할아버지 강돈욱이 세운 창덕학교 5학년에 편입했으나, 1925년 2월 김형직이 또 체포되자 팔도구로 돌아왔다. 김형직은 탈출한 후 양세봉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 무송으로 이전해 무림의원을 열었다.
김성주는 무송에서 무송제1소학교를 다녔으나 퇴학하고, 정의부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든 화성의숙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자 공산주의자인 김창민과 이종락, 조선공산당 화요파의 주요 간부인 한별과 박윤서 등을 만났다.
1926년 6월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했으며, 1927년 오동진의 주선으로 길림 육문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공산주의자인 상월(스승)과 송무선 등을 만나면서 자신을 후원하던 오동진, 현익철, 양세봉 등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점차 멀어졌으며, 1929년 육문중학교를 퇴학한다. 남만참변 이후 김성주는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약 8개월간 길림감옥에 수감되었다 나온 후 이종락, 차광수 등과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에 소속되었고, 이때 세금을 징수하러 다니면서 가명으로 '김일성(金一成)'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5·30폭동 이후 중국공산당 길돈 임시당부 회의에서 진한장과 함께 예비당원이 되었으며, 1931년 8월 정식 중국공산당원이 되었다. 안도반일유격대에 참가했고, 1932년 2월에는 우 사령(우학당) 구국군 부대의 별동대 대장으로 안도현성전투에 참가했다. 그해 7월, 어머니 강반석이 세상을 떠났다.
1933년 1월 김성주(이하 김일성)는 왕덕림 등이 이끄는 구국군 총부 부대가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을 포기하고 소련으로 들어가려 할 때, 별동대와 함께 소만국경까지 이들을 따라가 월경을 만류하며 함께 싸울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이후 당의 인정을 받은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정치위원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동녕현성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는 구국군과 유격대, 지청천과 조경한 등이 이끄는 한국독립군 등과 함께 진행했으며, 김일성은 작탄대를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했다. 1934년 3월 동만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2군 독립사로 통일되었고, 김일성이 소속된 왕청유격대가 제3연대로 편성된 후 3연대 정치위원에 임명된다. 이해에 지청천의 한국독립군과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1933~34년 반민생단투쟁으로 수많은 한인(조선인)이 희생당했고, 김일성 역시 끊임없이 민생단 혐의를 받고 처형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1934년 10월 하순, 1차 북만원정(북한에서는 이를 ‘조선혁명군 제1차 북만원정’으로 명명)에 참가했으며, 반민생단투쟁의 오류가 드러나면서 1935년 5월 동북인민혁명군 2군이 설립되자 김일성은 제3연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중권 | 희망과 분투

중권에서는 항일연군의 위상과 조직을 결정하는 여러 중요한 회의들을 소개한다.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명칭을 변경한 1935년 7월 25~8월 20일의 코민테른 제7차 대표대회, 1936년 3월 동북항일연군 2군과 3사를 신설한 미혼진회의, 1936년 5월 1일 동북항일연군 2군 1사와 3사(사장 김일성)의 백두산 일대 진출을 결정한 동강회의, 1936년 7월 초순 중국공산당 남만지구 제2차 당 대표대회 및 동북항일연군 1로군을 결성한 금천하리회의 등이 열렸다.
김일성은 1934년 10월부터 1935년 2월까지 진행된 제1차 북만원정과 1935년 6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진행된 제2차 북만원정에 참가한다. 북만원정에서 동북인민혁명군 2군과 5군은 연합작전을 벌였고, 김일성은 주보중의 5군 산하 시세영, 이형박, 진한장 부대와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한다. 코민테른 제7차 대표회의 이후, 1936년 2월 동북항일연군 총사령부가 건립(총사령 양정우)되었고, 3월에는 동북항일연군 2군이 신설되었다(김일성은 2군 제3사 사장으로 임명). 서남차전투, 한총령전투, 해청령전투 등에 참여하며, 5월에는 동만지구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발기했다.
7월 초순 중국공산당 남만성위원회(서기 위증민)가 성립되면서 동북항일연군 1군과 2군은 1로군으로 재편되었고, 김일성은 2군 6사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서강전투, 무송현성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8월 말 장백현으로 이동한 김일성의 6사부대는 수많은 밀영을 건설하고, 대덕수전투, 소덕수전투, 반절구습격전투, 소탕하전투, 7도구전투 등에 참가했다.

하권 | 역경과 결전

1937년 1월 도천리 평두령매복전을 시작으로 리명수전투, 대사하전투, 횡산제전투, 용천갑전투, 19도하전투 등을 치렀으며, 6월에는 보천보전투가 있었다. 김일성은 당시 6사 지휘관이었으나 보천보에는 직접 들어가지 않았다. 이후 구시산전투, 3종점전투 등을 치렀고 항일연군 1군 2사 및 2군 4사, 6사가 연합한 간삼봉전투(총지휘 전광)에 참가했다.
1938년에는 15도구전투와 대홍단전투, 서북차전투를 시작으로 쌍산자전투, 반절구습격전투 등 수많은 전투가 있었다. 양정우 부대의 핵심 지휘관이었던 안광훈, 정빈 등이 귀순하자 이해 7월 1로군을 3개의 방면군으로 재편성했다.(2차 노령회의, 총지휘 양정우, 총정치부 주임 전광) 김일성은 11월 남패자회의 때 설립된 2방면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서강전투, 외차구전투, 류수하자전투 등이 진행되었고, 일만군과 귀순자들로 조직된 정빈정진대 및 최주봉돌격대 등의 압박으로 1938년 12월 초부터 다음 해 3월 말까지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고난의 행군을 했다.
1939년에는 한총령전투, 계관라자전투를 시작으로 4월 장백현 북대정자회의를 통해 국내진공작전을 결정하여 무산지구 습격전투를 벌였으며, 이후 대홍단전투, 올기강전투, 대사하전투, 계관라자산전투, 육과송전투, 쟈신즈전투 등 수많은 전투가 진행되었다.
1940년 항일연군은 일제와 만주군의 거센 토벌작전으로 양정우를 잃었고, 1로군도 거의 괴멸되었다. 작은 전투들을 계속 진행했으나 더는 버티지 못한다. 10월 소련 경내로 철수하던 중 김일성은 김정숙과 결혼했고, 10월 21일 소련으로 들어갔다. 이후 소련 남야영 1로군 부대에 편성되었다.
1941년 4월 김일성은 남야영 1소부대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소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나와 그해 11월까지 활동하다 소련으로 복귀했다. 그해 12월 남야영 행정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942년에는 소련극동홍군 제88여단(국제교도여단) 제1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9월에는 중국공산당 동북당특별지구 위원회 부서기로 임명되었다. 이후 소련에서 지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9월 19일 강원도 원산항을 통해 입국했으며, 22일 평양에 도착하여 10월 14일 조선해방경축집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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