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정책적으로 서점의 설립을 금하거나 억제하였다.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 때문에 서적의 유통은 책 거간꾼이란 뜻의 책쾌(冊?)라 불리던, 떠돌이 책장수들이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강압과 차별이 난무하던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책쾌 조생은 1720년 전후부터 1870년 전후까지 붉은 수염 휘날리며 동서남북 존비귀천을 가리지 않고 나는 듯 달려 책을 팔았다. 반세기 넘는 재위기간 동안 영조는 무시로 금주령을 선포하였다. 그런 중에도 그는 술 외에는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으며, 사시사철 삼베옷 한 벌에 짚신 한 켤레만을 꿰차고 다녔다. 그런 그를 두고 정약용은 ‘붉은 수염을 한 사람으로 우스갯소리를 잘 하였으며, 눈에는 번쩍번쩍 신광이 있었다.’며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수록된 「조신선전曺神仙傳」을 빌어 ‘붉은 수염에 혹 무슨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하였다. 조수삼은 역시 ‘그의 모습은 사십 남짓 돼 보였다. 손꼽까.보니 벌써 사십 년 전 일이다. 그런데 지금도 늙지 않았으니 정말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묘사하였다. 유만주가 쓴 『흠영欽英』과 서유영의 『금계필담錦溪筆談』등에도 그에 관한 일화가 여럿 실려 있다. 그렇듯 많은 이들로부터 신선이라 회자되던 그가 하늘이 부여한 책임을 다하고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기까지, 척박한 걸음걸음을 견디게 해주었던 건 다름 아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나는 믿는다.
책쾌 조생을 지금 이곳에 나는 듯 내달리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절망과 좌절을 삼켜야 했던지. 무릎을 꺾인 채 두 번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듯, 자괴감에 휩싸인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연꽃에 담긴 애잔함을 솔개의 비상으로 승화시키고 싶다는, 열망에 의지해 기어이 신발 끈을 고쳐 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이들의 애정과 배려 덕분이었다. 제각각의 모양과 색깔을 띤,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결코 다다를 수 없었음을 나는 믿는다. 안성호 대표와 편집팀원들을 비롯하여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준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책을 덮자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내가 마치 붉은 수염 휘휘 날리며 한양을 누비던 책쾌 조생인 것만 같았다. 위로는 궁중 대작, 아래로는 웃음을 파는 노류장화까지, 조생 같은 이가 있어 한 시대의 문화가 물처럼 흘렀겠지.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다. 상상력은 역사와 또 이렇게 절묘한 궁합을 이룬다. 김남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