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은 우리 헌법에도 규정이 되어 있지만 우리 헌법에는 박애란 말은 존재하지도 않고 헌법학 차원에서 어떤 논의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프랑스 대혁명의 기본 이념이라고 되어 있을 뿐입니다. 자유 평등과 함께 삼위일체 개념으로 박애가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헌법, 일본헌법은 물론 대부분 근대 헌법들이 프랑스 이념을 대단히 중시하는 이념사적인 관련이 있으면서도 박애를 규정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최근 학자들 중에는 Fraternite라는 말을 협력이나 계급 간 갈등을 초월한 연합이나 연대로 보자는 주장이 있는데요. 즉 시민계급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결집해서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는 이데올로기로, 차라리 연대 또는 우애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박애나 우애나 연대나 동지애나 형제애나, Fraternite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하든 비슷비슷한 개념인 것 같습니다.
우애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공감과도 다르다고 합니다. 아담 스미스가 도덕경제의 차원에서 공감의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는 경제적 관계를 보완하는 대면적이고 정서적인 유대를 뜻했습니다. 또 우애는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동정심(대면적 관계에서 생기는 타자와의 감정적 유대)과도 다르다고 합니다. 즉 우애는 “직접적이고 대면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를 인간성의 진보를 향한 상호의존관계로 반성적으로 파악할 경우에 인식되는 상상적 유대”라고 합니다. 이는 한국식 연고 사회의 인간관계는 아니고, 연고관계도 아닙니다. 즉 인간성의 진보라고 하는 상호의존관계로 성찰적으로 파악할 경우에 인식되는 상상적 유대라는 것입니다.
우애는 사회를 낳지만 감정은 공동체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사회와 공동체는 구분되어야 하는 개념입니다. 사회란 우애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공동체는 감정집단이라는 거죠. 이는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라는 사회의 구분과도 다릅니다. 게마인샤프트는 공동체이지 사회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고향, 마을, 지역, 선거구 같은 것들은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는 아니라는 거죠. 우애 집단은 아니라는 거죠. 그냥 생래적으로 고유하게 지역단위로 가족단위로 족속단위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와 사회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고조선 공동체는 존재했지만 고조선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합니다. 신라라는 공동체는 존재했지만 신라라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이나 한국에 인간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국민만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고. 어떤 의미에서 사회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와 국가만 존재하는 사회는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졸라는 드레퓌스를 지켰으나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불가능했던 이유는 사회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은 차이에 근거하지, 개인적 능력이나 민족적 성격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사회를 의식하면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고 그것이 시대적 과제인데, 우리는 아직까지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는 우리가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국적에 의해 생기는 차별이 사회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단적인 예인데요, 이른바 국민의식입니다. 우리 헌법을 보면 인간이라는 주체 개념은 없습니다. 다 국민이죠. 인간의 권리와 의무가 아니라 국민의 의무와 권리입니다. 국적이 인간성의 근본가치로 되어있습니다
저는 사실은 박애가 편하게 표현하는 것 같지만 가장 인간다운 이념이고 대단히 위대한 이념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인간답다는 얘기는 물론 동정심이나 자애, 시혜, 이런 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하는 이야기고요. 좀 더 추상적이고 사회 연대라고 표현될 수 있는, 나와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인간으로서 동료로서 연대를 얘기한다는 것인데요. 제 식의 이야기로 말하자면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선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연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자연, 다른 자연과는 다른 ‘인간’이라는 ‘류’를 얘기할 수 있죠, 우리가 공동으로 인류라는 ‘자의식’을 형성할 수 있을 때, 그 때 바로 다른 자연으로부터 단절되고 비약하는 그 지점과 연관되는, 그 지점을 짚어주는 이념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좀 들었거든요,
서구 근대의 보편적 이념이라는 자유, 평등, 박애 가운데, 이른바 탈근대, 새로운 전환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좀 다른 측면에서 주체의 성숙, 인간 자체의 진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문명, 새로운 역사 단계를 모색한다면, 박애가 그 때 더 많이 주목하고, 관련하여 논리나 컨텐츠 등을 더 많이 개발해야 할 이념, 가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간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얘기가 있었던 것을 견주어서 뿐만 아니라 박애 자체가 대단히 인류 자체의 진보 진화와 관련된 이념의 면모, 즉, 아까 말했던 ‘자연적 인간’, 생존 자체에 지배당하는 단계로부터 도약하여 ‘인간적인 인간’으로 나아가는 지점과 연관지을 수 있는 이런 측면이 있다고 저는 그렇게 보고 싶었고요.
유럽사회 미국사회 일본이나 인도까지 포함해서 68혁명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한국만큼은 사실상 제외되어 있죠. 당시 한국사회는 대단히 독재적인 통제사회 상태에 있었고 반체제 내지 반정부세력도 정치적인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상성의 혁명이나 변화는 최근까지도 뚜렷이 보이는 게 없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68혁명 정도의 대폭의 근본적인 서구 혁명 내지 행동혁명이나 그 뒤에 나타나는 영향들, 철학이나 인문학적인 변화 같은 것과 비교해볼 때 우리 사회는 대학의 변화도 그렇고 학문의 변화도 그렇고 68혁명이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변화는 없다시피 했습니다. 68혁명 이후에 생겨난 많은 유파들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일종의 지식소비정도에 그치고 그게 그야말로 우리의 일상에 관련되어서 그런 논의가 근본적으로 시작된 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일상성의 혁명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우리 사회에 미치지 못한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내지 서구 근대의 또 다른 이념들인 자유와 평등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는데요. 박애를 인간의 자연적 상태로부터 구분되는, 도약한 인간다움의 측면에 주목할 때, 자유와 관련해서 박애를 접목시킨다 하면은, 이전에는 ‘생존의 자유’, 즉 굶주림이나 공포,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같은 ‘정치경제적 자유’가 주효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와 다른 이른바 ‘내면의 자유’라 표현해야 할지, ‘존재의 자유’라 할지 이런 부분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게 박애와 연관시킬 수 있는 지점,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보고요. 평등과 연관해서 말하면 지금껏 주로 ‘동일한 평등’, 특히 경제적으로 동등한 상태, 정치적으로 동등한 권리로서의 평등을 많이 얘기해 왔다면, ‘고유한 평등’, ‘저마다의 고유함’을 살릴 수 있는 평등의 확장 발전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고요.
코로나19는 인종, 민족, 성별, 계급, 직업 간의 심각한 불평등과 전 세계 사회의 많은 다른 분열을 폭로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보장하며, 취약한 사람들을 더 잘 보호하고, 위험한 기후 변화를 바로잡으며,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무시해 온 수많은 잘못들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19는 카뮈의 소설에서 상상된 페스트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세계도 1940년대의 세계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방대한 자원, 향상된 과학지식, 그리고 세계적인 정보망을 가진 우리는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단절되고 엄청나게 부당한 시대의 모델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 즉 페스트를 물리쳤다고 헹가래치는 백인들만의 잔치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건강해야 나도 건강합니다. 모두가 평등해야 나도 평등합니다. 코로나19에는 제국도 식민지도, 부자도 빈민도 없습니다. 그렇게 [페스트]는 다시 쓰여야합니다. 적어도 우리로서는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새로운 비대면 사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이니 사회보장이니 하는 것들도 새롭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사회연대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내용에 사회연대가 들어가야 합니다. 프랑스혁명에서 말한 자유 평등 박애는 그런 점에서 다시금 삼위일체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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