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국내외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고양되는 속에서 운동을 통일하고 이를 선도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민민협과 국민회의가 통합하여 민통련을 결성하게 되었다는 것이 선언문의 요지였다. 한편 선언문은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민족의 지상 과제로 여기는 그 어떤 집단이나 개인과도 연대할 것임을 천명했다.
--- p.71 「1장│1980년대 재야세력의 성장과 역할」 중에서
발족식에서 민추협은 ?민주화투쟁선언문?을 통해 “전두환 정권은 소수의 부패한 특권층만을 위해 절대다수 국민들을 핍박하고 수탈해오고 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국가의 존엄을 해치는 군부독재를 청산해서 국민이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시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 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민주화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해 민주화추진위원회를 발족한다”고 밝혔다.
--- p.110 「2장│민주화추진협의회의 구성과 ‘저항·선명 야당’의 성장」 중에서
1986년 말 학생운동은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정부의 탄압이 갈수록 거세지며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는데, 야당이나 재야 등 반정부 세력과 연합전선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고립된 노선 투쟁과 관념적인 과격성 때문에 학생 대중들의 관심도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1980년 이후 학생운동이 대중적 운동으로 급성장하면서 나타난 일종의 필연적인 부작용이었다. 학생운동의 기반은 급격히 확대되고 있었고, 대중적 동원력 또한 1970년대나 1980년대 초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어 있었다. 급격히 과격한 주장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되고, 이론 투쟁이 선명성 경쟁이 되어버렸던 것은 기반이 확대된 운동이 노선과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 p.166 「3장│학생운동의 발전과 6월항쟁」 중에서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역사에서 온산병과 이주투쟁이 차지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 왜냐하면, 온산병 투쟁은 반공해운동단체들이 주민운동을 직접 지원한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이다. 1983년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한국공해문제연구소(공문연)를 필두로 공해반대청년운동협의회(공청협),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공민협) 등이 조직되었다. 1983년부터 공문연은 온산을 답사하면서 그동안 무시되었던 피해를 객관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중금속에 의한 공해병 문제는 정부에서 철저하게 통제하였고, 학계의 조사도 은밀하게 제제를 가했다. 현지조사단 파견과 건강조사를 위한 설문조사, 각 종교단체와 연합을 통해 온산의 공해피해가 사회문제화됨으로써 환경운동의 확실한 전환점이 되었다.
--- p.195 「4장│6월항쟁과 시민운동의 태동」 중에서
박종철의 고문사가 보도된 16일부터 학생, 재야 민주단체, 종교계 등에서 고문살인 정권을 규탄하는 성명이 이어졌다. 박종철의 고향인 부산에서는 16일 부산대 학생 300여 명이 고문살인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부산민주화연합회 지도부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다음날 신민당이 자체 진상조사단의 조사결과 박종철의 죽음은 고문치사사건임이 분명하다고 발표하며 국회 진상조사특위의 구성을 요구했다. 1월 20일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추모제를 개최했고, 1000여 명의 학생들이 합류하여 ‘고문살인 자행하는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월 23일에는 전국 17개 대학에서 언론 추산 1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박종철 고문치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동부지구 9개 대학 학생 700여 명은 고려대에 모여 ‘고 박종철 학우 추모제’를 개최했고, 서울대, 중앙대, 단국대 등 서울시내 6개 대학 학생 200여 명도 서울 중구 신당동 중앙시장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에 항의하는 기습가두시위를 벌였다. 분향과 추모제 그리고 시위들이 전개되며 박종철 고문치사에 대한 분노와 항의는 각계로 확산되어 갔다.
--- p.209 「5장│1987년 민주화투쟁과 6월항쟁」 중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1987년 전국적인 6월항쟁의 복합국면에서 한미관계가 재구조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결정적 국면으로서 이후의 역사에 경로의존성을 부과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는 애초부터 조건부였다. 미국은 비록 상황변화에 떠밀려 전두환 정권을 승인하기는 했지만 통치스타일까지 무조건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는 구정치질서와 여야 국회의원을 비롯한 구정치인, 그리고 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세력을 정치불안의 원천으로 지목하고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권한 뒤에는 달랐다. 더 이상 남 탓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p.292 「6장│5공화국 헌법과 6·29선언」 중에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민주화 조치를 담은 6·29선언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군부 권위주의 세력의 완전한 청산이 아닌 ‘타협에 의한 민주화’였기 때문에 많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민주항쟁의 실질적 요구를 담아야 할 헌법 개정이 민주화운동의 실질적 주역이던 재야와 학생 세력을 배제하고, 보수 야당과 청산대상인 민정당에 의해 진행된 점은 민주화의 진전을 더디게 한 결정적 원인이었다. 물론 새로운 헌법은 그동안 억압되었던 국민 기본권을 신장시키는 등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기성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통령 임기와 선출 방법이 왜곡되고, 노동자의 권익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는 등 많은 한계 역시 노정되었다.
--- p.338 「7장│제13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중에서
아울러 노동자대투쟁은 광범한 노동자를 단련시키고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투쟁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자신들을 억압하는 체제와 각종 제도의 구조를 인식하게 되었고 투쟁을 통해 노동자 자신들의 힘과 단결이 갖는 큰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또한 투쟁을 통해 사회적 무력감이나 패배주의를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었고, 투쟁 과정에서 조직적 지도성의 중요성과 넓은 범위에 걸친 연대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 p.366 「8장│87년 노동자대투쟁과 노동운동의 성장」 중에서
한편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학생운동 내에서도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1986년 무렵부터 NL(민족해방) 계열의 학생운동이 표면화되자 대학가에는 북한, 통일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과제로 민족해방을 강조했던 학생운동 집단은 자주화투쟁을 정점에 놓고, 민주화운동과 함께 ‘조국통일촉진투쟁’을 주요 투쟁목표로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과거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에 집중한 나머지 통일운동을 방기해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 p.388 「9장│6월항쟁 직후 통일운동의 분출」 중에서
1987년 6월항쟁 이후를 민주화의 이행기로 규정하고 민주화 과정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제도정치와 국가의 개방적 재편, 시민사회의 자율성의 확대란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군부 권위주의의 퇴조,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장, 지방자치제 확산, 계급적 대중운동의 조직적 발전, 민중운동과 구별되는 시민운동의 출현과 분화라는 국내적 상황의 변화와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세계화 담론의 확산이라는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운동방식의 수정과 전환을 가속화하였다. 1987년 민주화는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위로부터의 민주화’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최장집, 2005; 조희연, 1990).이는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왔던 한국의 사회운동세력이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이룰 정도로 강력한 사회운동 역량을 갖고 있었지만,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저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p.439 「10장│민주연합운동과 시민운동」 중에서
6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5·18광주민중항쟁 때처럼 군을 동원해 6월항쟁을 진압하고자 했다. 하지만 광주와 그 부근 지역으로 한정되었던 5·18과 달리 전국적인 범위에서 동시다발로 전개되는 6월항쟁을 진압하는 것은 군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미 5·18 당시 엄청난 유혈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그 보다 몇 배는 더 큰 규모로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던 6월항쟁을 또다시 군을 동원해 진압하는 것에 커다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력으로 지탱하기 힘들고, 군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길을 선택했다(박준성, 2016: 187~188).
--- p.467 「11장│한국 근현대사 속의 6월항쟁」 중에서
87년체제론은 정치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1997년 말과 1998년 초에 걸쳐 발생한 금융위기와 이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적응 과정에서 ‘97년체제론’이 만들어지면서 사후적으로 정교화된 것이기도 하다. 금융자본주의와 노동시장에서의 비정규직의 확대, 계층의 양극화 등을 강조하는 97년체제론은 87년체제의 연장이자 대립물로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87년체제론은 30년간 이상 유지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구조사적 설명틀이지만, 동시에 사회운영의 원리가 신자유주의로 전환되기 직전의 10년간의 국면사로 해석되기도 한다.
--- p.505 「12장│6월항쟁 연구의 흐름과 재해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