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작물이 순화·개량된 지역이 인간 문명의 발상 지역과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정착지를 정해 정착 농업을 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인간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농업은 경제 활동인 동시에 문화 활동이기 때문이다. 서부 아프리카 니제르강 주변, 이집트 나일강 하구, 중국의 황하 지역, 이라크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 페루의 마추픽추 안데스가 이러한 지역이다. 작물이 있는 곳에 인간이 있었고, 인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작물이 함께 있었다.
작물은 무엇보다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세세만년 무수한 인간을 살려 준 은총의 선물이다. 선조들이 만들어 대대손손 우리에게 전해 준 골동품보다 몇 갑절, 몇 백배, 몇 천배 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를 살게 해 준 작물보다 더 귀중한 유산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 pp.12-13, 「들어가기」 중에서
아프리카에도 한때 숲이 우거져 있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숲을 개간해서 농지로 만들었다. 숲을 농지화한 다음 비가 와서, 또 열대 폭사열로 토양이 유실되고 화학적·생물학적 성분과 유기물이 없어져 토양이 쓸모없어졌다. 그리고 토양 산성이 높아져서 작물 생육에 부적합한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토양이 유실되어 쓸모없어지면 비도 쫓아 버린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는 사막이 매년 5m씩 남진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중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어 사진(沙塵)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유전자원 사태도 이와 같은 이치로 수천 년 수만 년 전 선조들이 만들어 준 그 귀한 작물의 품종이나 그의 야생종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먹고 살아갈 작물 품종과 그의 근연종, 즉 작물 유전자원의 재생이 불가능하고 회수와 이용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면 인간의 생명을 존속시켜 주는 작물의 유전자원이 사라지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 조상들이 애써 이루고 축적해 놓은 것이 영영 없어지는 것이다.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있겠는가?
-p.68, 「작물의 유전자원 사태」 중에서
바빌로프 박사는 아마도 서부 아프리카를 탐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서부 아프리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서부 아프리카가 재배 식물의 센터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이 지역에 위치한 국제열대농학연구소에서 23년간 연구하며 여러 나라를 방문 조사한 결과, 서부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주요 작물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서부 아프리카를 새 작물의 센터로 추가할 것을 제의한다. 이렇게 주장할 근거는 충분히 있다.
서부 아프리카의 니제르강 상류 사바나 지역인 말리, 니제르에서 원초적 인간이 기원전 5000년~4000년경에 주로 수수, 조 등의 잡곡류 재배와 가공 기술을 개발해 농경 문화를 일으켰다. 잡곡류 재배 기술과 가공 기술이 에티오피아로 넘어가 중동으로 전해졌고, 더 나아가 동남아와 중국, 한국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Murdock, 1959; 형기주, 1993).
서부 아프리카에는 우리 벼와 가장 가깝고 오직 하나뿐인 사촌 아프리카 벼(Oryza glaberrima)가 있다. 그렇게 멀고 먼 서부 아프리카에서 독립적으로 발상하고 거기에 정착해 일가를 이루었다. 어떻게 그곳에서 수천 년수만 년 동안 연명하고 살았을까?
-p.214, 「제9 작물의 고향, 서부 아프리카 센터(새로 추가한 센터)」 중에서
산간 지대인 문경에서 가을보리를 가을에 파종하면 너무 추워 어린 싹이 모두 얼어 죽는 해가 있고, 가을보리를 봄에 파종하면 보리 씨가 저온 감응(低溫感應)이 안 되어 식물체만 무성히 자란 채 이삭이 패지 않는 좌지 현상(座止現象)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얼보리(凍麥, 얼은 보리)를 이렇게 개발했다. 대한(1월 20일경)에 가을보리 씨를 물에 불려 얼지 않도록 움집에 놓아두었다(이때 보리 씨는 싹튼다). 입춘 무렵(2월 4~5일) 가을보리씨를 꺼내 그늘진 곳에 두어 45일가량 얼린 다음, 우수(2월 20일경)에서 경칩(3월 20일경) 사이에 얼음이 풀리는 대로 전년 가을에 지어 놓은 보리 고랑에 얼보리를 파종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겨울을 넘기는 동안 보리 싹이 얼어 죽을 염려도 없고, 물에 불려 얼린 얼보리 씨는 그 사이 저온 감응되어 가을에 파종한 가을보리와 같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이 이론은 러시아의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 1898~1976)가 1928년에 개발한 춘화 처리와 같은 원리다. 고상안 선생은 리센코보다 300년 앞서 가을보리의 추파성을 소거해 춘파성으로 변화시켜, 봄에 심을 수 없는 가을보리를 봄에 심어 성공적으로 재배하는 기술을 처음으로 정확히 보고했다(김영진, 2017).
--- pp.252-253, 「고상안 선생의 보리 춘화 처리」 중에서
아프리카에서 일하며 지구를 20번 이상 돌았다. 많은 산, 많은 강, 많은 나라, 많은 땅, 많은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생활 풍습과 전통도 보았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농학인으로, 곳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며 먹고 살기 위해 땀 흘려 농사짓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다. 지역마다 농사짓는 사람도 달랐고, 모습과 방법도 달랐고, 기후와 토질과 작물도 달랐다. 각 지역마다 기후와 토질, 그리고 문화와 전통에 따라 지역 주민들이 재배하고 있는 작물도 달랐다. 각 지역에 재배되는 작물들은 거기 기후, 토질, 문화, 전통에 알맞는 작물들이다.
이 작물들은 오랜 세월 각 지역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 그 지역의 기후, 풍토, 문화, 전통에 알맞는 식물을 선발하여, 그런 조건에 알맞는 것으로 만들어 낸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이다. 식물의 진화는 자연 상태에서도 이루어지지만 인간도 거기에 끼어들어 식물 진화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해 왔다.
지구상의 식물은 주사위를 땅 위에 던진 것처럼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지구상의 만물은 원인이 있어 태어난 결과물이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높고 높은 이치로 만들어진 것이다. 왜 그곳에 그 작물이 생긴 것일까? 그 작물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왔나?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질문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
--- pp.369-370, 「나가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