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꿈을 꾸다 잠을 깼다.
자다 깬 곳이 어디인지 잠시 헷갈렸다. 먹빛 하늘이 전면 창을 통해 그대로 쏟아져 내려와 있었다. 비를 잔뜩 품은 하늘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로 주변이 어수선했다. 엉망으로 취한 와중에도 씻기는 했었는지 소파 테이블에는 기초화장품이며 쓰고 난 화장솜 등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 p.8
기억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더러 희미해지고 지워져도 몸으로 감각했던 것들은 잘 잊히지 않는다. 예를 들면 통증이라든가 냄새라든가 맛 같은 것. 내 눈앞에서 흘러갔을 풍경들이 그 향기와 맛을 감각했던 순간의 장면들로만 앞뒤 맥락 없이 하나하나의 정지된 화면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 p.17
아침에는 그 라멘 가게, 점심에는 건너편 출구 쪽에 있는 회전초밥집, 두 곳 모두 내가 열 살 때 헤어진 엄마를 다시 만나, 엄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던 초기에 즐겨 가던 곳이었다. 한국에서의 학적으로는 고등학교 이학년, 아버지가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한때는 나에게도 새엄마였던 여자와 함께 독일로 떠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열여덟 살의 엄마가 스물일곱 직장인인 아버지를 만났던 나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 p.34
하루만, 딱 하루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프고, 나는 춥고 떨리고, 중국 비즈니스호텔의 난방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 온기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거라고. 그동안의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잠시 재영이 아닌 그저 사람의 온기를 품은 ‘남자’였을 뿐이라고. --- p.51
계단을 통해 일층까지 걸어 내려왔다. 다리가 아파서 중간에 엘리베이터를 탈까 생각했지만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재영이나 차 대리와 마주칠 수 있었다. 얼떨결에 거짓말은 왜 해가지고 이 고생인지,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 p.60
현관 앞에서 디지털 도어락의 키판을 열고 번호를 누르려다 순간 당황했다.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키판 가까이 손가락을 댄 채로 집중해봤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필름이 끊기도록 술에 취해서도 손가락이 기억하는 리듬과 감각에 맡겨놓으면 문은 저절로 열렸다. 그런데 이제 몸의 리듬과 감각이 깨지고 의식마저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 p.63
어제와 같은 하루였고 내일과도 같을 오늘이었다. 적당히 일이 몰렸고, 적당히 문제가 생겼고, 적당히 짜증이 났고, 적당히 해결됐고, 적당히 만족스러웠고, 적당히 쓸쓸했다. 재영과 차 대리가 서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마주 보고 웃고, 나란히 외근 나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며 이제 슬슬 그와의 결별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다. --- p.80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히데오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돈다. 마트에서 샴쌍둥이처럼 둘이 하나로 맞붙어 있는 당근이 신기해서 사 온 내게 당장 갖다 버리라며 화를 내던 그가 눈앞에 서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화를 냈던 그 장면이 생생하다. 이렇게도 생생한데, 눈도 코도 입도 없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생겼는지, 키는 얼마나 되었는지. 나보다 한 뼘쯤 컸었나, 두 뼘쯤? 그의 어깨에 내 머리가 닿았던가, 팔뚝에? 기억을 지웠더니 추억마저 사라져버렸나. --- p.117~118
그는 계속 나를 놀리며 웃었지만 나는 울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가슴을 때리며 울었다.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나도 두려웠던 것이다. 아기가, 아픈 아기가 태어날까 봐서. --- p.150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혹시나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 참 잘 살고 있구나. 그래 나도 잘 살고 있어. 얼마 전에 우리가 함께 갔던 수목원에서 찍은 사진을 찾았어. 거기가 어디였는지 기억나?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서. 그런데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는 있을까. 여전히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 p.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