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지난 세기 전환기의 격동 속에서 실존의 고뇌를 온몸으로 겪으며, 그 치열한 삶을 문학적 형상으로 승화시켜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올려놓은 시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실의 직할지였던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독일어권 시인의 한 사람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모친은 그에게 여섯 살까지 여자아이의 옷을 입혔고, 부친은 그를 장트[聖] 푈텐 육군유년실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렇게 그의 어린 시절은 각각 첫딸을 잃은 모친과 장교가 되지 못한 부친의 대리 보상을 위한 제물이 되었고, ‘잃어버린 어린 시절’은 훗날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프로 나타나게 된다.
릴케는 육군고등실과학교를 중퇴하고, 백부의 후원으로 인문고등학교 졸업 시험에 합격한 후 1895년 겨울 학기부터 프라하대학교에서 문학, 역사, 미술, 법학 등을 공부했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부지런히 시를 써서 발표했으며, 대학입시 준비 중에 첫 시집 ≪인생과 노래(Leben und Lieder)≫(1894)를 출판했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문학 수업은 뮌헨대학교로 옮긴 후,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1861∼1937)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릴케보다 14년 연상이었던 루는 릴케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 주고, 두 차례나 러시아 여행에 동행해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평생 동안 릴케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그 후 릴케는 북독일의 예술가 마을인 보릅스베데의 풍경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 결과를 ≪형상시집(Buch der Bilder)≫(1902)으로 펴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여기서 만난 조각가 클라라를 아내로 맞이했으나(1901), 딸 루트가 출생한 직후 백부의 유산에서 받아 왔던 지원이 갑자기 끊기는 바람에 신혼부부는 생존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릴케는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1840∼1917)에 대한 평전 집필을 청탁받고 파리로 갔는데 릴케의 파리 체험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그는 로댕으로부터 ‘끝없는 작업과 인내’라는 예술가의 자세를 배웠고, 그것을 ‘사물시(Ding Gedicht)’로 구현하려 했다.
이후 릴케는 덧없음과 고립으로 요약되는 삶의 부정적 의미에 시달리면서 ‘정처 없는 떠돌이’처럼 유럽의 전 지역을 돌아다니는 한편, ‘눈으로 본 시’가 아닌 ‘마음으로 느낀 시’를 쓸 방법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릴케는 1922년 초 불과 두 달 사이에 두 개의 장편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Sonette an Orpheus)≫를 완성했다. 필생의 과업을 마친 그는 4년 후 오랫동안 앓아 온 출혈성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원에서 51세에 눈을 감았다.
안문영
안문영은 서강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후기 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 이후 충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독어독문학회,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주요 관심 분야는 현대 독일 시와 번역 이론, 그리고 릴케와 괴테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적 요소 등이다. 괴테, 릴케, 첼란, 구체시, 문학 용어 번역 등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으며, 역서로 ≪릴케: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문학과지성사, 1991/1994), ≪제니 에르펜베크: 늙은 아이 이야기≫(솔출판사, 2001), ≪로버트 슈나이더: 오르가니스트(원제: 잠의 형제)≫(북스토리, 2006) 등이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지난 세기 전환기의 격동 속에서 실존의 고뇌를 온몸으로 겪으며, 그 치열한 삶을 문학적 형상으로 승화시켜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올려놓은 시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실의 직할지였던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독일어권 시인의 한 사람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모친은 그에게 여섯 살까지 여자아이의 옷을 입혔고, 부친은 그를 장트[聖] 푈텐 육군유년실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렇게 그의 어린 시절은 각각 첫딸을 잃은 모친과 장교가 되지 못한 부친의 대리 보상을 위한 제물이 되었고, ‘잃어버린 어린 시절’은 훗날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프로 나타나게 된다.
릴케는 육군고등실과학교를 중퇴하고, 백부의 후원으로 인문고등학교 졸업 시험에 합격한 후 1895년 겨울 학기부터 프라하대학교에서 문학, 역사, 미술, 법학 등을 공부했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부지런히 시를 써서 발표했으며, 대학입시 준비 중에 첫 시집 ≪인생과 노래(Leben und Lieder)≫(1894)를 출판했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문학 수업은 뮌헨대학교로 옮긴 후,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1861∼1937)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릴케보다 14년 연상이었던 루는 릴케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 주고, 두 차례나 러시아 여행에 동행해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평생 동안 릴케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그 후 릴케는 북독일의 예술가 마을인 보릅스베데의 풍경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 결과를 ≪형상시집(Buch der Bilder)≫(1902)으로 펴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여기서 만난 조각가 클라라를 아내로 맞이했으나(1901), 딸 루트가 출생한 직후 백부의 유산에서 받아 왔던 지원이 갑자기 끊기는 바람에 신혼부부는 생존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릴케는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1840∼1917)에 대한 평전 집필을 청탁받고 파리로 갔는데 릴케의 파리 체험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그는 로댕으로부터 ‘끝없는 작업과 인내’라는 예술가의 자세를 배웠고, 그것을 ‘사물시(Ding Gedicht)’로 구현하려 했다.
이후 릴케는 덧없음과 고립으로 요약되는 삶의 부정적 의미에 시달리면서 ‘정처 없는 떠돌이’처럼 유럽의 전 지역을 돌아다니는 한편, ‘눈으로 본 시’가 아닌 ‘마음으로 느낀 시’를 쓸 방법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릴케는 1922년 초 불과 두 달 사이에 두 개의 장편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Sonette an Orpheus)≫를 완성했다. 필생의 과업을 마친 그는 4년 후 오랫동안 앓아 온 출혈성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원에서 51세에 눈을 감았다.
안문영
안문영은 서강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후기 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 이후 충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독어독문학회,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주요 관심 분야는 현대 독일 시와 번역 이론, 그리고 릴케와 괴테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적 요소 등이다. 괴테, 릴케, 첼란, 구체시, 문학 용어 번역 등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으며, 역서로 ≪릴케: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문학과지성사, 1991/1994), ≪제니 에르펜베크: 늙은 아이 이야기≫(솔출판사, 2001), ≪로버트 슈나이더: 오르가니스트(원제: 잠의 형제)≫(북스토리,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