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성메이는 퇴근하고 회사를 나설 때 집에서 걸려온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피해자 측 사람들이 또 병원비 계산서를 가지고 찾아와 1,000위안을 내놓으라고 한다며 울먹였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무기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들도 돈 빌려달라고 할까 봐 나를 피해. 엄마는 1,000위안 달라고 쉽게 말하지만 돈 빌리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래도 우리 집에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이번 한 번만이야. 네 오빠도 이번에 나오면 정신을 차릴 거야.”
“잘도 그러겠다. 오빠가 언제 정신을 차리겠어? 다리가 부러져도 정신을 못 차릴걸. 어쨌든 빌려볼게.”
“내일 또 1,000위안을 줘야 돼. 힘들어도 되도록 많이 빌려봐. 어쩌겠니. 오빠가 나오면 다 네 덕분이라고 얘기할게. 다 늙은 우리가 무슨 방법이 있겠니. 너 아니면 누가 네 오빠를 구하겠어.”
“빌려보는 데까지 빌려볼게. 못 빌려도 어쩔 수 없어….”
“꼭 빌려야 돼. 그놈들이 우리 집 창문을 두드리면서 돈 안 주곤 못버티게 한댔어. 네 오빠가 사람을 때렸으니 우리가 어쩌겠니. 너밖에 기댈 사람이 없어. 가족이 안 도우면 누가 돕겠어? 우린 늙어서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판성메이가 짜증을 냈다.
“그놈들 돌아가라고 하고 내일 은행에 가서 기다려. 얼마든 빌려볼 테니까.”
판성메이가 전화를 끊고 긴 한숨을 내쉬며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쳐다보았다. 잠시 넋을 잃고 있다 사람들이 거의 다 탔을 때 문득 정신이 들어 버스에 올랐다.
--- 「18장」중에서
“성메이를 도와주고 싶은데 성메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성메이의 생각은 둘 중 하나일 거에요. 남이 참견하기를 바라지 않거나,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성메이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여준 행동으로 판단해보면 누가 도와주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성메이 모르게 도와주는 수밖에 없어요. 하이시가 아니라 성메이 집에 가서 해결해야겠죠.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정도로 관심 가져준 것으로도 충분해요.”
왕바이촨이 한참 동안 침묵하자 앤디가 다시 물었다.
“바이촨 씨가 나한테 연락한 건 성메이의 집안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라 성메이가 집안 문제에서 발을 빼도록 만들라는 건가요? 하지만 적당한 방법이 생각나질 않아요. 가족들과 얽힌 악순환의 고리가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건 아닐 텐데 쉽게 발을 뺄 수 있을까요? 바이촨 씨가 생각해놓은 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방금 전 바이촨 씨가 웨이 씨한테 했던 말만 들으면 바이촨씨가 이 일에서 무슨 역할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잘못 끼
어들었다가 일을 그르칠까 봐 그래요. 바이촨 씨의 계획이 뭔지 듣고 싶어요.”
앤디의 예리한 질문에 왕바이촨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성메이가 우리 도움을 원치 않는 건 자존심 때문인 거 같아요.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던 애니까… 작은 흠도 보여주기 싫은거죠. 하지만 앤디 누님 말대로 성메이 가족들의 악순환이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에요. 성메이 스스로 거기서 빠져나오기에는 역부족이에요. 그런데 제가 고향에 가서 알아보니까….”
“성메이가 자존심이 상할까 봐 걱정하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바이촨 씨가 웨이 씨에게 한 얘기로 보면 바이촨 씨는 내가 성메이에게 집안 얘기를 꺼내길 바라는 거 같아요. 성메이가 자존심이 강해서 작은 흠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 어째서 내가 그걸 성메이에게 얘기하게 하려는 거죠? 우리가 도와준다는 걸 성메이가 알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바이촨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난 그걸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에요. 설마, 성메이가 화내길 바라는 거예요?”
“성메이는… 늘 가면을 쓰고 있어요. 가족 문제를 대할 때도 가면을 쓰고 있고 성메이 자신도 가면을 쓰고 있어요. 그 가면을 벗겨야만 자신이 지난 몇 년간… 별로 당당하게 살지 못했다는 걸 알 거예요. 실은 그 자존심이란 것도 이미 바닥을 쳤다는 것도. 그러면 성메이가 진짜 자기 모습으로 가족 문제를 처리하고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예요.”
“바이촨 씨의 생각이 뭔지 이제 알았어요. 그 계획에 따를 게요. 성메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어서 바닥까지 치게 만든 다음 다시 태어나게 할게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바이촨 씨가 개입했다는 게 알려지면 성메이가 바이촨 씨를 원망할지도 몰라요. 바이촨 씨가 알려줬다는 건 비밀로 할게요. 또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 「18장」중에서
“성메이, 미안해, 로열클럽에서는 내가 경솔했어.”
판성메이가 차갑게 대꾸했다.
“사과할 거 없어.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굳이 생각을 통일할 필요는 없잖아. 괜히 잘난 척하려고 진심 없는 사과할 필요 없어.”
판성메이는 앤디를 보고 싶지 않아 관쥐얼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앤디가 말했다.
“걱정 마. 내 사과를 받아달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하지만 말해두고 싶은 게 있어. 로열에서 내 도움을 받아달라고 말한 건 적선하려는 게 아니었어. 방법은 틀렸을지 몰라도 잘난 척은 아니었어. 내가 그렇게 잘난 사람도 아니니까 너도 너무 자존심 세울 거 없어.”
“처음에는 경솔했다더니 이젠 방법이 틀렸다? 넌 네 생각대로 한거니까 해명할 필요 없어. 나도 말해둘 게 있어. 난 네 말처럼 자존심이 세지 않아. 네가 지적하고 싶었던 건 내 자존심이 아니라 열등감이겠지. 잘난 척하는 걸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자존심이라고 표현했겠지만 말이야. 생각해줘서 고마워.”
앤디가 관쥐얼과 추잉잉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사과하지 않을게. 다만 네게 상처를 준 건 유감이야.”
앤디가 관쥐얼과 잉잉에게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갔다. 관쥐얼과 추잉잉은 서로 쳐다보며 어쩔 줄 몰랐다. 왜 그러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며칠 전 판성메이가 우울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관쥐얼이 아는 게 더 많았으므로 더 많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앤디가 가고난 뒤 판성메이가 관쥐얼의 방에서 나왔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관쥐얼이 말했다.
“괜찮아. 터놓고 얘기했으면 됐어.”
추잉잉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고 있었지만 관쥐얼의 말을 듣고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뭘 터놓고 얘기해? 들을수록 아리송하네. 쥐얼, 혹시… 너….”
판성메이가 말허리를 잘랐다.
“별일 아니야. 생각의 차이지.”
하지만 관쥐얼을 흘긋 쳐다보며 그녀가 앤디와 제일 가깝고 취샤오샤오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게 생각났다. 관쥐얼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앤디의 거만한 태도가 싫어.”
추잉잉은 더 묻고 싶었지만 판성메이가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돌리자 관쥐얼이 그녀를 발로 툭 차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물었다. 판성메이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추잉잉이 관쥐얼에게 속삭였다.
--- 「19장」중에서
추잉잉이 신용 카드를 받아 물건 값을 계산한 후 커피를 포장해주었다. 그런데 남자가 계산대 주위를 계속 서성이는 것이었다.
“왜 그러세요?”
“라러우 냄새가 나요. 제 고향 냄새에요.”
“하하하! 후각이 정말 예민하시네요. 라러우를 소포로 받았거든요. 고향이 어디세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라서 지명을 써드릴게요.”
진지한 성격의 남자였다. 다만 글씨가 지렁이 기어가는 것처럼 비뚤배뚤했다.
추잉잉이 반색을 했다.
“와, 제 고향이 바로 그 옆이에요. 동향 분이시네요. 잠깐만요. 라러우를 조금 나눠드릴게요. 저도 나눠 먹어야 해서 한 줄밖에는 못 드리지만요.”
“설 전에는 계속 회사에서 지내니까 밥을 해 먹을 시간이 없어요. 설에는 고향에 내려가서 먹을 수 있고요.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난감해하는 남자를 보고 추잉잉이 말했다.
“그렇군요. 금연하는 사람 옆에 시가를 두는 셈이겠네요. 명함을 주고 가시겠어요? 타오바오에서 주문하시면 알아볼 수 있게요.”
남자가 카페를 나설 때 마침 들어오던 매니저와 마주쳤다. 매니저가 들어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요즘 감기가 유행이라더니 또 1명 만났네. 방금 나간 남자 모태솔로가 분명해. 여자 친구가 없으니까 씻지도 않나 봐.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더라.”
--- 「23장」중에서
“난 웨이 사장님이 좋은 사람인 거 같아. 마음씨 좋고 진중하잖아. 그런 사람이랑 결혼하면 평생 변치 않고 백년해로할 수 있을 것 같아. 앤디 언니는 외롭게 자랐으니까 웨이 사장님처럼 믿음직한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아.”
취샤오샤오가 ‘마음씨 좋고’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을 흘기기 시작했다.
“너희 둘 다 겉으로만 젊지 속은 완전히 늙은이구나? 평생 먹고 자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떻게 입만 열면 결혼 얘기밖에 안 해? 지난번에 야식 먹으면서 기껏 가르쳐놨더니 하나도 소용이 없잖아? 특히 잉잉. 넌 사람 보는 안목이 너무 떨어져.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관쥐얼이 추잉잉을 두둔했다.
“잉잉 말도 틀린 건 아니야. 각자 인생관이 다르잖아. 넌 즐거움을 추구하고 잉잉은 안정감을 원해. 각자 원하는 게 다른 건데 왜 잉잉을 놀리고 그래? 다시 또 헤어지고 상처받지 않도록 처음부터 옳은 선택을 하는 게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아니겠어?”
“겪어보지도 않고 어떤 게 옳은 선택인지 어떻게 알아? 우리 중에서 사랑에 대해 제일 말할 자격이 없는 게 바로 너야. 너나 잘해. 성메이 언니, 언니 의견은 어때?”
취샤오샤오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판성메이의 뒤통수를 향해 비스듬한 시선을 던지자 관쥐얼이 조마조마해졌다. 판성메이는 자기가 하이시로 돌아간 뒤 집에 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지, 귀가 얇은 엄마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지, 오빠가 또 사고를 치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에 뒷좌석에서 벌어진 토론에 끼지 않고 있었지만 취샤오샤오가 묻자 하는 수 없이 의견을 말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 있잖아. 앤디가 누굴 좋아하고 누구와 잘 맞느냐가 제일 중요하지.”
“맞아. 그러니까 앤디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앤디는 가족이 없으니까 우리가 앤디의 가족처럼 조언을 해줘야지. 앤디 언니에게 누가 더 어울릴 것 같아?”
판성메이는 병원에서 자신이 제일 힘들 때 웨이웨이가 일을 잘 처리해준 것을 떠올리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난 웨이 사장님이 좋아.”
추잉잉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예! 3대 1! 샤오샤오, 패배를 인정하시지.”
--- 「25장」중에서
“많이 생각했어요. 당신이 고지식한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요. 하지만 나도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결국 우리 둘 다 힘들어질 거예요. 그만 헤어져요. 혼자만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요.”
“앤디, 사랑 앞에서 너무 이성적일 필요는 없어요. 며칠 동안 나도 많이 생각해봤어요. 당신 앞에선 왜 자꾸 서두르게 되는지, 내가 당신을 날 싫어하게 만든 건 아닌지.”
앤디는 특이점이 철저히 미루고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반지, 부모님께 인사드리기 같은 것들 말이다. 앤디가 말했다.
“당신은, 아주 이성적이에요.”
특이점이 우뚝 말을 멈추었다가 잠시 후 말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거예요? 지금 갈게요. 얼굴 보며 얘기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제발 만나서 얘기할 수 있게 해줘요.”
앤디가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오해는 없어요. 그저 성가신 것뿐이에요. 성가시고 짜증 나서 그만하고 싶어요.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하지 말아요. 당신을 꼭 봐야겠어요. 지금 당장.”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아요.
--- 「26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