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레스토랑으로 들어온 남자는 혼자였고, 어깨는 우울해 보였다.
--- 첫문장
아버지의 유서는 문어체 슬픔. 명동백작과 창덕궁을 거닐던 봄날을 기록했다. 마리서사 귀퉁이에서 아직도 여전히 서성이는 아버지는, 중국산 수의 차림의 아버지는 장례식장에 흩날리던 벚꽃으로 남루를 덮고 싶었던 것이리. 비루했던 말년의 어느 날, 예순의 딸에게 들려준 한 움큼의 통속은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던 시인과의 사생활, 그리고 럭키스트라이크.
--- 「문어체(文語體) 슬픔」 중에서
삶의 방법론으로써 문학은, 가끔 나에게 비단 옷을 입혀주고 자주 나에게 찢어진 낡고 허름한 입성으로 저잣거리로 내몰았다. 나는 궁극의 결핍과 질시 속에서 자라나는 그늘의 이끼와 같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오래 시간을 견디고 누추한 초록으로 자신의 허물을 조금씩 덮어나가는 그 지지부진한 시계의 태엽을 구태여 돌리지는 않았으니, 지난한 시간들에게 나는 가슴을 찢으며 경배 드린다.
--- 「그는 내게 좌파다」 중에서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세상의 잡음이다. 뒤틀린, 어딘가 고장이 난, 희미하고 애매하고 아득한, 바람과 구름처럼 잡을 수 없는, 네가 맞다고 감히 우길 수 없는, 네모난 박스에 절대 들어가지 않는, 구겨진, 허벅지에서부터 새끼발가락까지 길게 기스 난 검은 스타킹 같은, 엇갈린 단추, 안개비 오는 들판에 야전을 틀어놓고 홀로 춤추는 오후 같은 것, 지글지글 스크래치와 함께 겨우겨우 돌아가는 빽판에서 흘러나오는 뷰티풀 선데이, 오래된 역사 벤치에 앉아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며 빈 담뱃갑을 구겨 던지는.
--- 「잡음의 세계」 중에서
파산 후 좋았던 점은, 엄마와 부엌에서 맞담배를 피웠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현모양처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착하고 음전한 여자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했다. 우리는 다정했다. 부뚜막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한 손으로는 고등어구이를 뒤집으며. 그 장면이야말로 엄마와 가장 다정했던 기억이리.
--- 「매정하기 짝이 없는」 중에서
휴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했던 남자의 이름이다. 나는 그를 류라고 부르곤 했다. 그는 스물다섯 살 즈음에 자살했는데 유서는 남기지 않았다.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첫 출근을 했고, 죽기 이틀 전인가 첫 월급을 탔다고 친구를 만나 턱을 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소식이었다.
--- 「휴」 중에서
...1980년 봄은 누구에게나 슬플까. 남편을 처음 만났던 그해, 그 봄이 역사의 중심이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연애를 막 시작하던 어느 날, 남편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왔다. 그날부터 남편은 풍경 속에 나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당시는 흔하지 않았던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사진을 찍으면 카메라 아랫도리에서 필름이 인화지가 되어 스르르 밀려나왔다. 희부윰한 필름을 나는 빠른 속도로, 아주 빠른 속도로 흔들었다. 빨리 흔들어야 내재된 잉크가 한곳으로 몰리지 않고 잘 인화되는 것이다. 펄럭펄럭. 내 슬픔의 기원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까.
--- 「내 슬픔의 기원」 중에서
한없이 무모했던 어떤 시도들이,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나의 질주들이, 실은 나의 나 됨을 가장 극열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이 나를 감격하게 한다. 아, 지난 세월에 감사한다. 자주 흔들렸지만 자주 눈물을 흘렸지만 자주 넘어졌지만 그 상처는 영광스럽다. 깊고 넓은 삶의 흔적을 가진 것에 감사한다.
--- 「마침내 나는」 중에서
....인간은 어리석어서 일생동안 아흔 아홉 번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단 한 번의 찰나적 환희를 떠올리며 다시 아흔 아홉 번의 참혹한 현실을 견디어 낸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인간은 지혜로운 것일까? 한 알 먹으면 잠이 들 수 있는 약과 한 알 먹으면 죽을 수 있는 약과 한 알 먹으면 행복할 수 있는 약 모두를 발명했고 적절하게 그 약을 복용하면서 죽기까지 삶을 견디어낸다.
--- 「바람의 신부와 치즈케이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