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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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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 황금알 시인선-216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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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8월 3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294g | 134*218*15mm
ISBN13 9791189205706
ISBN10 11892057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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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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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속에 들어서자
반듯하게 갖춰진 지필묵부터 먼저 보인다

눈부신 백지 한 장이 바닥에 깔려 반짝이고
명암이 깊은 하늘에 자작나무 붓끝이 막 묵墨을 찍는 중이다

붓을 떼자 기러기 한 마리
깃털에 묻은 먹을 털고 푸른 하늘로 날아오른다

쭉쭉 곧게 세워진 붓대들의 연결 사이로
가득한 여백의 연결이 도드라져 보이고

붓과 여백이 마음껏 필묵의
자유를 누리며 작품을 자작自作하는 중이다

먹을 갈고 붓을 다듬는다
찍고, 긋고, 맺기를 반복한다

자작나무 숲 백지 위에
구김 없는 또 한 장의 백지를 반듯하게 펼친다

자작자작 찢어 흩뿌리는
파지 조각이 내 어깨에 하얗게 쌓인다
--- 「자작나무 자서전自敍傳」중에서


진한 먹물에 붓을 찍습니다 생명선이 살아있어
차람차람 붓끝이 차진 태붓
떨리는 듯 곧은 선을 긋습니다

태 안에서 그리고 태어나서 다시 백일을
더 자란 딸애의 머리카락에서 따스한 울림이
고물고물 기어 나와 그의 심장에 닿습니다 그렇게
사군자를 쳤고 좋은 글귀 뽑아 열두 폭 병풍
준비해 두었는데

시집을 안 가겠다 물러서지 않는 딸
30여 년 걸어놓았던 실고리가 삭아 걸지조차 못하는
붓만 같습니다

한때 붉은 발가락이었고 말랑말랑한 마디였고
솜털이었던 저 닮은 손주라도 안고 온다면야 명주실로
짱짱한 고리를 만들어 붓걸이에 걸어둘 것인데
책상 서랍 구석으로 밀어내 버린
침묵 한 자루

근 삼 년 만에 그가 다시 붓을 잡습니다

젖배 곯은 아기가 젖을 빨 듯
물 타지 않은 진한 먹물을 빨아들이는 붓
그가 탱탱해진 붓을 어르고 달래는 일은 침묵에 빠진
자신을 구출해 내는 일

잎 성근 잣나무 한 그루 일으켜 세웁니다 그 아래
쌓기도 하고 흩기도 했던 한 생의 명암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의 호흡들이 골고루
펴 발라진 오두막 한 채

지난한 한 생을 떠받친 서까래가
그저 고요히 달빛을 뿜어냅니다
--- 「태모필胎毛筆」중에서


대숲은 걸어서
강물은 흘러서 십리 길을 함께 가더라
차갑고 고요하게 빛나던 댓잎들이
비가 내리자
더 짙푸르고 탱탱하게 강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더라

아무도 모르는 달빛 아래서
아무도 모르게
손닿지 않는 하늘을 품고 싶어 몸을 곧게 뻗어 올렸던
푸른 기운

아무래도 이 길은
내 초록을 되찾아 가는 길
그 시간에게 건네는 따뜻한 악수
그대 생각만으로 십리 대숲길이 환하더라
--- 「십리 대숲 길」중에서


발가락이 노란 새 한 마리 숲을 꿰고 있습니다

새의 맥박 소리 가늘게 흔들려 고요를 꿰고 있습니다

돌이 물밑에 가만 엎드려 물살을 꿰고 있습니다

시간이 소리를 꿰고 소리는 시간을 꿰고 있습니다

물뱀이 단풍을 시침질하는 햇살을 꿰고 있습니다

푸른 물잠자리 날개가 바람을 꿰고 있습니다

너와집 처마 그을음이 가을의 중심을 꿰고 있습니다
--- 「물수제비」중에서


된서리 맞기 전에 청 고추를 땄다

며칠이 지나도록 풋 티를 벗지 못하고
붉으락 푸르락 응석을 부리듯
한 바구니 가을이 빨갛게 익어간다

아직은 고집스럽게 초록을 버리지 않는
고추를 골라내다가
어머니가 거처하던 빈방을 들여다본다

그놈의 고추, 고추 하나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끝끝내 아들을 품지 못하고
서까래에 불과한 딸, 또 딸, 여섯 번째 막내인 나를
기록하고 끝나버린 어머니의 일기를 읽는다

아기가 태어날 때 고추를 달고 나는지 나서 그것이
풋고추처럼 맺히는 것인지 어린 나는 늘 궁금했다

밤사이 뚝딱 고추 하나 단단히 맺혀져 있기를
밤새워 뒤척이다가 아침이면 그 절망을
앙가슴에 꽁꽁 묻어두시기도 했던

어머니의 소망은 절벽 끝 낙락장송에 걸려있는
작은 귀주머니를 따는 것이었을까
너무 높고 아슬아슬해서 줄이 끊어진 악기 같아서
끝끝내 따지 못한 까마득히 올려다만 보다가
평생토록 목젖이 아팠던

저 희끄무레한 낮달
비로소 홀가분하게 낙락장송에 도달했다
--- 「어머니의 낮달」중에서


그 아침 우연히 지나치다
풀숲에 떨어진 모과 한 알을 보았고
무심코 올려다본 순간
샛노랗게 빛나던 별들, 하루가 눈부셨다

모과나무 아래 앉아 나는 계절을
읽었고 가을을 필사했는데
모두가 추락하던 그 순간이 아찔해 까맣게 질렸을까
때를 놓친 모과 한 알이 아직도
뛰어내리지 못하고 매달려있다

이때껏 젖 먹여 키워준 어미나무도
무작정 매달리는 부족한 손을 차마 놓지 못하고
꼭 잡고 있다

뜨거운 한 장면을
봄눈이 촉촉하게 식혀준다
--- 「부족한 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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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이 ‘ㄹ’음이 견인되고 있는 모든 어휘들은 벌써 아름답게 반짝인다. 이 작품에서 색깔을 나타내는 유일한 형용사 ‘노란’ ‘푸른’도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은 익숙하고 낯익은 조국의 가을 풍광을 맑고 깔끔하게 서경하고 있다. 초라한 너와집이 보이는 산촌풍경에서 연민의 감정이 어른거리지만 결코 압도하는 비애에 빠지게 하지는 않는다. ‘ㄹ’음은 무겁거나 심각하지 않다. 맑고 깨끗한 서정과 이 음의 반복은 아주 잘 어울리며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작품이 보여주는 의외의 아름다운 심상과 완벽에 가까운 음악성을 대하며 「물수제비」는 이번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작품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 호병탁 (시인·문학평론가)
박분필 시인의 시편들을 직조하는 자유로운 붓놀림은 필묵筆墨의 여백으로 웅변한다. 시집 전체를 묵향으로 감싸면서, 시 이전에 쓰이지 않은 시의 백지에 자작自作하는 필법으로 오래된 예스러운 대상들을 소환하는 풍경들이 그윽하고 깊다. 또한, 대상과 대상이 ‘꿰고’(「물수제비」) 있는 인간의 감각에서 배제된 미세한 파동들을 포착하고 접하는 찰나의 묘사는 시인의 운명 같은 이름 분필처럼 타고난 필경사가 아닌가.
- 김영탁 (시인·『문학청춘』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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