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는 어느 때는 힘과 에너지였다가, 또 어느 때는 병폐와 분열증 그리고 “세기의 질환maladie du siecle”이었다.
--- p.20
낭만주의는 주관화된 기연주의다. 왜냐하면 낭만주의에게 본질적인 것은 세계에 대한 기연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 낭만적 주체가 신을 제치고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주체는] 세계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오직 자기를 위한] 순전한 동기로 삼는다. [이렇듯] 최종적인 권위Instanz가 신에게서 천재적인 “자아”로 이양되면 [사태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진정으로 기연적인 것이 순수한 형태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 p.28
낭만적인 것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무한한 소설의 출발점Anfang eines unendlichen Romans”이 된다. 노발리스에게서 연원하는 이 표현─이것은 [낭만주의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은 세계에 대해 낭만주의가 맺는 특수한 관계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묘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소설이나 동화가 아니더라도, 한 편의 서정시나 음악 작품, 한 편의 대화나 일기, 편지, 한 편의 예술 비평 혹은 연설, 그도 아니면 심지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분위기만으로도 주체의 기연적 태도를 입증하기에는 충분하다는 사실 말이다.
--- p.30
어원에 따르면, “낭만적”이란 단어는 “소설 같은romanhaft”이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이 말은 본디 소설Roman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사 장르의 상위 개념Oberbegriff을 세분해주는 것으로서 ‘낭만적’이란 단어는 그 말 자체로 이미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함축적 의미를 거느릴 수 있다. 본서가 의도하는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는 이 어원학적인 의미에 다시금 부응하고자 하며, 이러한 의도는 빅토어 클렘퍼러Victor Klemperor가 수행한 흥미로운 문헌학적-문학사적 연구에 의해 특별한 보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낭만주의란 단어는 거의 백 년 가량 지속된 지독한 혼란으로 인해, 이제는 경우에 따라 어떤 내용이든 내키는 대로 채워 넣으면 그만인 텅 빈 그릇처럼 되어 버렸다.
--- p.51
낭만적인 것은 기하학적인 선이 아니라 아라베스크 무늬다.
--- p.124
모든 개념은 자아이며, 거꾸로 모든 자아는 개념이다. 모든 체계는 개인이고, 모든 개인은 체계이다. 국가는 연인이다. 국가는 인간이 되며, 인간은 국가가 된다. 혹은 뮐러의 『대립론』에서 인용하자면, 만약 긍정과 부정이 객관과 주관처럼 서로 대립한다면, 그것은 객관과 주관에 다름 아닐 것이다.
--- p.129
공허하고 피로한 반복 속에서 그들은 거듭 새롭게 확신한다. 자신들은 거짓이 아닌 “참된” 개념을 다루고 있다고. “참된 것”, “현실적인 것”, “진정한” 자유, “진짜” 혁명, “진실한” 성직자, “진실한” 신앙, “진리를 담은” 책, “진짜” 인기, “올바른” 상도, “진정한” 공화국─이것의 본질은 “진정한” 군주제를 이룩하는 데서 성립한다─“진정한” 법학, “참된” 결혼, “참된” 낭만주의, “참된” 학자, “현실적인” 교양인, “진정한” 비평, “참된” 예술가 등 제대로 열거하자면 수많은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낡은 개념에 “진정한echt”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 창조자라는 자아도취가 사라진 뒤에는 환멸 속에서 사태가 곧장 뒤집힌다. 즉, 아이러니를 통해 세계를 농락하던 주체는 이제 자신이 [오히려] 수많은 참된 실재들이 연출한 아이러니의 대상임을 깨닫는다.
--- p.148
주관적인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격정은 공동체를 건립할 수 없으며, 사교 활동에 대한 탐닉은 지속적인 결속Verbindung을 위한 토대가 되어 주지 못한다. 아이러니와 음모는 사회적 결정점結晶點이 아니며, 외따로이 살지 않고 활기찬 대화의 흐름 속으로 뛰어 든다고 해서 사회 질서가 잡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회도 무엇이 정상이며, 또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질서를 이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념상 정상적인 것은 낭만적일 수 없다.
--- p.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