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그러고 어딜 간 거지?” 주위를 살피던 지오는 구두상점 옆으로 나 있는 골목길로 들어가 봤다. 좌우, 그리고 이 골목길 중 한 곳으로 여자는 걸어갔을 것이다. 지오는 그중에 골목길을 선택했다. 어떤 느낌이 있어서였을까. 그는 길지 않은 골목길을 달렸고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던 비디오방 앞에서 여자를 발견했다. 여전히 중성적으로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몸에 잘 맞는 투피스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적인 매력은 철저히 감소시키고 있었다. 키가 커서 그런가. 그는 여자에게 다가가며 인상적인 뒷모습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어떤 점이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그의 감정 한 부분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게 잘 차려입고 잘 배운 사람도 길에서 울고 다녀요?” 그의 목소리에 여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오늘 날씨, 어제보다 더워요. 해가 져도 더위는 먹는데요. 울면서 힘 빼지 말고 그만 그쳐요. 알았죠?” 여자가 돌아섰다. 예상대로 단정한 두 눈에는 아까 보았던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 여자를 처음 마주쳤을 땐 이런 얼굴을 보리라 짐작도 하지 못했었는데. 오히려 차갑고 이지적인 눈매에 이유 없이 당황하고 말았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사장님이 뭐라 그래요?” 눈은 그대로인데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은 멈추질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그 모습에 지오는 아릿한 안타까움을 느껴야 했다. 여자의 눈물을 막아주고 싶었다. 무표정하게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으면 좋겠다. “목마르죠?” 그는 대답 없는 여자의 손을 이끌고 앞을 향해 걸었다. 울어본 기억은 별로 없지만 그럴 때마다 목이 탔었다는 걸 어렴풋이 떠올렸기 때문이다. 여자는 우는 모습을 들킨 게 창피해선지 아니면 정말로 목이 말라서인지 군소리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백화점에서 마주쳤던 격 있는 비서의 모습이 아니었다. 근처 과일전문점으로 들어갔다. 과일빙수 두 개를 시켜 앞에 놓고 스푼을 건네주었더니 받긴 하는데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아버리고 만다. 그는 못 본 척하며 자신의 빙수를 입 안에 떠 넣었다. 차가운 얼음가루들이 갑자기 목안을 얼리자 관자놀이까지 얼얼하게 충격이 전해졌다. 대각선으로 한 테이블, 과일 파르페 하나를 다정히 나눠먹고 있는 어린 학생 커플. 지오네가 들어오기 전 과일전문점에 유일하게 앉아 있던 손님들이다. 그들은 창백한 여자의 얼굴위에 나있는 눈물자국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슬쩍슬쩍 살펴보더니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이쪽 동정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오 혼자 빙수 먹기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빙수를 한입씩 먹을 때마다 여자와 대각선 아이들을 교대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언제까지고 앉아만 있을 것 같던 여자가 내려놓았던 스푼을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눈치 없이 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지오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로마의 휴일이지요.” 먼저 말을 꺼낸 건 그가 아닌 그녀였다. “뭐가요?” 갑작스런 말에 지오는 어리둥절해졌다. 로마의 휴일이라니, 대체 뭐가. “그 영화, 안 본 건가요?” “네.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본 적은 없어요.” “그렇군요.” 여자는 반도 안 먹은 빙수그릇을 앞으로 조금 밀어놓았다. 한숨을 삼키듯 숨을 들이쉬더니 그를 향해 얼굴을 든다. 본래 화장기가 거의 없는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립스틱까지 지워져 있어 더욱 창백해 보였다. 피곤한 얼굴. 그녀는 지오의 눈을 감정 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오드리 헵번이 유럽 소국의 공주로 나와요. 공식방문차 로마에 왔다가 미국인 기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그레고리 팩이지요. 남자는 여자와 처음 만난 그날 밤에 이렇게 말해요. 그렇게 잘 입고 잘 배운 사람이 왜 길에서 자느냐고. 여자가 길가에 누워 잠들어 있었거든요.” 메마른 목소리였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기보단 그저 무엇이라도 떠들고 싶어서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12시가 넘은 시계를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똑바로 누웠다. 몸은 피곤해 죽겠는데 오늘 하루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헤집고 있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차가운 방바닥에 문질러주다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여자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집까지 함께 가겠다는 말에 여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오가 고집을 부릴 걸 미리 알고 체념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알게 된 여자의 집은 그의 집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파트였다. 무슨 까닭인지 그녀의 눈물에 마음이 상하는 걸 느꼈었다. 모르던 여자였는데, 마주친 지 불과 하루가 지난 것뿐인데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쓰이던 여자. 그는 다리를 내려 그대로 엎드린 후 휴대전화를 쥐었다. 1번과 9번을 누르니 삐 하는 신호음과 함께 액정에 ‘여사장’이라고 뜬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란 말은 없었지만 오늘 약속의 결과를 알려줘야 할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물론 귀찮아하겠지만 그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많이 귀찮아하다가 직접 만나볼 마음이 생기도록. 그래서 어찌하여 그런 자비를 베푼 것인지 스스로 말해줄 마음도 더불어 생기도록. 그러나 여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을 연거푸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 후 지오는 메시지를 남기기로 결심했다. “어제 충고는 고마웠어요. 평소대로 대하는 게 제일 좋은 거 맞더군요. 그 말 하려고 전화한 건데 안 받네요. 나중에 할게요.”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잘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