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사주, 관상, 풍수지리나 서양의 점성술, 타로를 보면 어디나 운명학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운명에 관심을 두거나 그것을 종교인 양 떠받드는 까닭도, 모두 정해진 운명을 알기 위함은 아닌 것이다. 상류사회를 1%로 치고, 99%가 중,하류인 세상에서 자신의 운명을 안다고 끝나겠는가. 운명을 바꾸고 싶지 않겠는가. 행운을 상승시키고 불행을 막고 싶지 않겠는가 말이다.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학의 최종 목적은 ‘개운’이라는 데 동의하게 된다. 막힌 운을 열고, 운을 상승시키는 것. 나쁜 운을 좋은 운으로 바꾸는 것.
--- 「하나. 2 행운을 불러들이는 방법」 중에서
사실 농사 운운할 뿐, 나 역시 섣불리 시골로 내려가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남들은 비웃겠지만, 내겐 심각한 문제다. 바로 바퀴벌레와 쥐가 너무 무섭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녀석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남들은 겨우 ‘벌레’ 때문에 그렇게 열망하는 곳으로 가지 못한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삶은 크고 거대한 문제로 한 번에 무너지기보다는, 작은 문제가 쌓이고 곪아서 터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그 말을 했더니 친구들은 다시 신이 났다. -그보다는 차라리 네가 바퀴벌레나 모기에게 적응하는 게 빠를 것 같은데. -지금부터 훈련해 보는 게 어때? 몇 마리 보내 줘? 꺼져!
--- 「하나. 10 시골살이의 문제점」 중에서
잠을 자려고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때가 아파트에서 살며 가장 괴로운 때다. 침대의 위치를 애초 잘못 잡았다는 생각도 든다. 좀 다르게 놓을 걸. 잠이 들면 자세가 흐트러지겠지만 일단은 바로 누운 다음, 어김없이 이런 상상에 빠진다. 지금 나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는 사람이, 나의 아래와 위에 포개어져 수십 명이 되겠구나. 아파트란 것은 어찌 그리도 사람을 규격에 맞춰 놓는지. 만약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 바깥에서 들여다본다면, 이건 정말 차곡차곡 포개어 놓은 도시락 상자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층층이 똑같이 놓인 침대에서, 사람만 쏙쏙 빼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층만 다를 뿐, 비슷하게 정리된 공간에서 비슷한 사람들이 꿈지럭거리고 있다.
--- 「하나. 12 대단위 아파트는 이상하다」 중에서
-가족은 ‘발’과 같다.
나의 몸뚱어리 아래, 가장 밑바닥에서... 보이지 않게 나를 지탱하고 있는 발.
더럽고, 냄새 나고, 못생기기까지 한 발.
휘어진 발가락과 트고 갈라진 뒤꿈치,
시커멓게 탄 발등과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발바닥.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주 씻고 관리하고 보살피는 손과는 반대로
남에게 보일 일도 없고
차마 보여 주기도 부끄러운
귀찮으면 씻지도 않은 채 내버려두거나, 나조차도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아주 못생긴 발.
그러나 발이 없으면 나는 홀로 설 수 없다.
발이 없으면 나는 아무데도 갈 수가 없다.
가장 바닥에서, 어둡고 습하고 냄새 나는 신발 안에서,
발은 온 힘을 다해,
나의 전신을 지탱해 주고 받쳐 주고 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내가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 「둘. 1 소설에 쓰려고 아껴둔 기막힌 표현」 중에서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며 우울감을 극복하려 애썼다. 거대한 세상과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가 얼마나 작고 미미한 존재인지, 남들 또한 작고 미미한 존재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렇게 세계를 확장시키면,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것 같은 세계가, 나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세계가 되고, 욕을 듣는 나나, 욕을 하는 친구나 모두 작은 존재가 된다. 때문에 우울감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세계를 확장시킨들, 나를 모르는 타인으로 채워진 드넓은 세계를 상상해본들... 그 세계는 나에게 영향을 주디 못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나에게 ‘악플’로 아픔과 고통을 주지도 않지만, ‘선플’로 칭찬과 기쁨, 위로도 주지 못하는 게 아닌가. 결국 확장된 세계는 나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 채 뚝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나는 다시... 나에게 악담이든 격려든 말을 해주는 가까운 사람들로 채워진 세계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들이 내 세계의 전부가 되어, 그들의 손가락질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는 것이다.
--- 「셋. 17 우울감을 치유하기 어려운 이유」 중에서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은, 시작, 혹은 출발일 뿐이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푸른 물결뿐인, 드넓은 바다에 도착했을 때,드디어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난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이 꿈꾸는 파라다이스 섬을 향해, 그는 이제 파도의 힘, 물길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팔로, 자신의 힘으로 노를 저어가야 한다. 그 힘을 갖추었는지, 갖추지 못했는지는 먼 바다에 도착하면 알 수 있다.
그런 능력을 키우지도 않고,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이, 한순간의 인기에 도취돼,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다’가 결국 넓은 바다에서 길을 잃은 채 슬픈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지금도 연예계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면서, 배가 앞으로 쭉쭉 나가는 것이 자신의 힘이라고 착각해 버리고는, 바다 한가운데서 끔찍하고 무서운 미래를 맞이한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봤으며, 지금도 보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라’라는 말이 무섭다.
--- 「넷. 11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 그리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