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적 관조와 깊은 성찰을 형상화한 명편
- 강홍중의 시 세계
조동숙(문학박사·시인)
강홍중의 시를 읽으면 많은 시들이 꾸밈이나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풋풋한 삶의 향기가 배어나는 정화의 힘이 느껴진다. 그의 시에서는 동물, 자연, 사물이 인간 존재와 동일한 존재로서 만만치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관념론적인 사유가 아닌 생활 속에서 터득한 깨달음이 창작의 원동력이 되어 폭넓은 호소력을 획득한다. 서로 간의 의미 있는 교감이 시인의 정신적 지향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시 세계에서 전개되는 공간은 서정적이고 향토적으로 주체와 객체 간의 조화로운 교감과 일체감을 보여준다. 근원적인 생명체가 뿌리내리는 향토는 시인이 견지해온 낭만성과 전통에의 지향을 통한 심미적 공간의 구축이며 서정적 자아의 내면의식과 결부된다. 정감이 넘치는 토속어나 방언을 시어로 즐겨 사용하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강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 『시의 품속』은 관조와 성찰을 통해 흐르는 세월과 소용돌이치는 삶에 대한 사유가 보다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것으로도 우선 큰 성과를 획득했다고 본다. 무수한 삶의 메아리들이 순수하고 풍부한 서정성의 획득으로 시적 효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을 덕목의 가치로 보는 도가사상에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특히 관조를 통해 생명체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뜨게 되고, 시적 감성이 심미적 경험에 의해 보다 고요하고 황홀해진다.
내가 목격한 대상 앞에
더 가까이 서서
고요 속으로
시선의 초점을 맞추고
옆을 살피고
뒤를 돌아봐야 한다
먼 곳과 가까운 곳
위와 아래를 함축하고
들어갈 입구
나올 출구를 찾아
오늘은 그대 깊은
마음속을 몰래 비춰보리라
- 「관조」 전문
있고 없음은 분명하다
현재 있는 것은 있음이고
없는 것은 없음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내가 있음은
얼마나 고유한 있음인가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있어야 할 충실한 생각이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없음이냐
내 마음을 출렁이는 물결과
반짝이는 아름다운 생각이 있다면
이 얼마나 고귀한 있음이냐
- 「존재의 의미」 전문
‘관조’라는 정신작용을 통해 성찰에 이르게 됨으로써 보다 오롯한 시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관조와 성찰의 과정을 거쳐 디오니소스적 욕망과 광란, 삶의 부질없는 야단법석들도 고요 경에서 정화되고 치유됨을 시사한다.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알곡처럼 ‘충실한 생각’, ‘출렁이는 물결과 반짝이는 생각’의 희구는 바로 시인의 지향점이며 미의식이 된다.
젊은 시절 내가 연모했던
신속히 정확히는
이미 나를 두고 멀리 가버리고
인생길 한참을 기다리다
적당히 신중히 둘을 만나
급할 게 없소 천천히 가세
늦게 핀 들국화 향 그윽한데
서산의 해 뉘엿뉘엿 먼저 저문다
- 「모퉁이」 일부
삶의 여정에서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을 하나씩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자는 지혜의 필요성이 공감을 얻고 있다. 언젠가는 신의 섭리에 불려가야 하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 시의 기저를 이룬다. 「푸른 마음」, 「달팽이」, 「무당개구리」, 「말 머리」, 「자숙」 등의 시편에서도 성찰의 깊이를 살펴볼 수 있다. 관조와 성찰이라는 정신작용을 통해 농익은 지혜들이 마치 누에의 고치에서 비단실이 나오듯 시인이 빚어낸 언어에서 그 광채를 발산하고 있다. 따라서 아포리즘의 잠언적인 시적 미감을 감지하게 한다.
다음의 시편들에서는 생활인이자 시인으로서의 본질적인 물음,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과 관련하여 그 답을 스스로의 삶 속에서 추구하고자 한다.
멈춘 길이
나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느냐고
길이여 쉬지 마라
걸어야 길이고
길어야 길이다
- 「길에게」 전문
아득한 세상길
달고 쓴 인생길
보일 듯 잡힐 듯
세월의 그림자를 쫓아
길 없는 길
한없이 걸었네
기다려 준
순백의 그대 앞에
속이 까맣게 탄 내 시심
- 「검은 군무」 일부
이 도저한 인생의 길도, 시의 길도 삶의 여정에서 멈추지 말고 쉬지 말고 걸어야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뼈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 번째의 시 「검은 군무」에서는 ‘시’의 탄생을 위해 시인의 쓰라린 고뇌가 진득이 배어 있어 급기야는 속이 숯덩이가 될 정도로 타 들어감을 환기시키고 있다. ‘순백의 그대’는 백지이며 ‘속이 까맣게 탄 내 시심’과의 팽팽한 긴장감이 극대화되고 색채의 대조로써 이미지 전달이 선명하고 효율적이다. 그 외 「시의 품속」, 「가을날을 붙잡고」의 시편들에서도 인생과 시에 대한 문답이 겸허하고 진지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다음은 시인의 세계인식이 따뜻하고 유쾌한 삶의 긍정으로 시의 세계를 이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시들을 주목해 보자. 위트가 있고 재미와 희망이 있다.
오
오십 년 만에 피는 소철꽃
아
백 년 만에 피는 대나무꽃
어
봄에 피는 코스모스
휴
가을에 피는 아카시아 진달래꽃
호호
입 다무세요, 사랑에 때가 있나요!
- 「별난 꽃」 전문
이 세상 사람들
등지고 살면 안 된다고
서로 등에 꽃등을 달아주며 사는 것이라고
늘 푸른 대숲
시심의 잔등에 꽃등을 달고
그대를 마중하고 싶다
- 「대숲의 시화등」 일부
위의 「별난 꽃」은 세속의 풍습과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 징후를 감칠맛 있게 응축한 시로 씁쓸한 현실의 삶을 상쾌하게 반전시켜 준다. 시의 치유효과도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일찍이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문인, 루 살로메는 심리치료를 하면서 환자들에게 연인 릴케의 시를 낭송케 함으로써 치료의 효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이 회자되고 있다. 「대숲의 시화 등」에서는 ‘서로 등에 꽃등을 달아주며 사는’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시인의 시심이 아늑한 울림으로 전해온다. 서로에게 꽃이 되고 사랑을 베푸는, 살 맛 나는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어울림」, 「꽃병」, 「친정 꽃」, 「빛과 소망」, 「뚱딴지」 등의 시편들에서도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번에는 황량하고 스산한 삶의 너머에 존재하는 고향의 향토를 떠올려 보자. 시인은 향리의 그 넉넉한 품속에서 뒤틀린 정신이 정화되고 치유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향토에 대한 감탄과 경이감에서 그의 시가 생명력을 발휘하며 사물들에게도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준다. 나아가 침묵하던 대자연이 말문을 열며 시인과 교감하고, 그로 인해 순수하고 풍부한 서정성은 심미적 효과를 거두게 된다.
뿌리의 근원
삶의 바탕
사랑의 궁극
정직의 극치
이 오묘한 품속
만물의 영원한 안식처
- 「흙」 전문
노을빛 물든 고향하늘
언제나 그리운 얼굴
어머님 생신 날
내의 한 벌 사서 들고 가던
가슴 설레던 시골길
자식 농사 인생사 반농사라고
두볼 논 잘 매야 소출이 많다고
흙밭에 뒹굴며 살았던 형제들
- 「어머니의 꿈」 일부
봄볕 만나
버들강아지 눈 부비고
탱탱 빈 들 달려온 경운기
보습의 날 세워 독새풀 가르마 탈 때
어머니의 호미질에 마늘밭 이랑이랑
고운 햇살 눈이 간지럽다
- 「다시 만나는 봄」 일부
열 손가락 자식 생각하며
어머니 손에서 빚은 송편이
달빛에 하얗게 바랜다
- 「추석」 일부
꽁꽁 얼어버린 저수지
동그란 얼음 숨구멍
물오리 새끼 한나절 자맥질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미 청둥오리 발은
얼음장 위에서 퉁퉁
- 「미운 오리새끼」 일부
어미닭 노란 병아리
풀밭에 안고 뒹굴었던 소꿉친구
박꽃 같은 어머니 미소
다시 한번 보고 싶다
- 「토종」 일부
아침 해가 다독이고
저녁 해가 쓰다듬는
황홀하고 아늑한 고향
때 묻은 심성
실개천에 헹구면
꽃길 따라 안갯속
또 하나 오솔길 있지
- 「고향 품속」 일부
위의 시 「흙」에서 ‘흙’은 모든 생명체의 모태로서 어머니와 동일개념이다. 흙의 냄새, 향리의 정경들은 시인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위의 시편들에서 형상화된 어머니의 모습은 자식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전통적인 모상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어머니의 호미질’, 사무치게 그리운 추석절 ‘어머니의 손으로 빚은 송편’, ‘박꽃 같은 미소’ 등으로 벌써 우리는 여러 추억과 회한으로 마음마저 흠뻑 젖으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아울러 어릴 적 친구, 형제들과의 겹쳐지는 추억들이 절정을 이루며 서로를 다독거린다. 그리고 생명체를 품고 키워내는 모성의 힘은 인간이나 동물에게 공통적임을 주지시켜 준다. 「미운 오리새끼」에서는 ‘꽁꽁 얼어버린 저수지 얼음 숨구멍’ 안으로 사라진 새끼를 향한 어미 청둥오리의 애간장을 녹이는 기다림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향토 서정이 물씬한 시편들에서는 일상의 흠결들이 정화되는 시인의 황홀한 경지를 바라보게 된다.
「산촌마을 늦여름 풍경」, 「싸리 소쿠리」, 「가을 새벽」, 「고개」 등의 시편들에서도 향토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드러난다.
특히 그의 시에서는 사람, 동물, 자연물들이 아우라를 형성하며 미학적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상호 간의 평화로운 공존관계를 유지할 때 온전한 삶으로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향리 함안에 대한 시인의 사랑노래 연작시는 눈여겨 볼만하다.
연분홍 얼굴로
새날을 맞이하는
태고의 여인이여
망각의 늪에 환생한
마주치는 눈길마다
천년 고도의 얼과 혼
- 「아라홍련」일부
아라리 아라리오
아라홍련 피는 함안에 천만년 살고지고
삼봉산 해 저물어도 살짝 주저앉은 봄날은
함안 땅에 마냥 머물고 싶다오.
- 「함안의 봄날」 일부
사랑하는 이여
삶에 시든 외로움
기억으로 보채던 그리움도 잠시 내려놓고
긴 여정의 함안 둑방 길
다 같이 걸어보자 살랑살랑
다 함께 뛰어보자 빨랑빨랑
- 「함안 둑방 길」일부
700년 전 고려의 연꽃으로 다시 태어나 꽃을 피운 것이 함안의 ‘아라홍련’이라 한다. 태고의 여인, 홍련에 대한 분홍빛 순정으로 천만년의 사랑을 맹세하는 아름다운 고백의 시로 자리한다.
「너무나도 산책로」, 「대장부 여항산」, 「여항산과 함께」, 「함안의 봄날」, 「함안박물관」 등의 시들은 향토 서정의 절창이다. 의인화된 사물들로 주객일체의 경지가 두드러진다. 산자수명한 향토의 품 안에서 물아일체의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존관계를 지향하는 시편들이다. 향리에의 자부심이 농익은, 향토 서정의 백미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고향은 시인에게 전 감각을 동원해서 세월의 거품을 걷어내고 온전한 삶으로 회귀하게 한다. 아라홍련이 아득하게 물결치는 고향 함안은 시인의 이상향인 것이다.
강홍중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유한과 무한, 생물과 무생물, 오고 감, 생성과 소멸 현상의 관계망을 서정적 관조와 깊은 성찰로 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나친 개인주의나 메마른 물신주의가 판을 치고, 그로 인한 소외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온정주의의 회복과 서정성의 확보가 절실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울러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과 지평을 열어 갈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