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라는 소설 제목 속, 한글 ‘과’는 둘 이상의 사물을 같은 자격으로 이어주는 접속 조사다. 영어 ‘and’도 보통 어·구·문을 대등하게 잇는 문법 기능을 가진다. 그러고 보니 접속 조사는 참 힘이 세다. 전혀 같은 자격으로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같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것이 같이 있는 제목에서 풍기는 이 강한 흡인력, 무엇인가 다른 생각들로 차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제목을 삶의 ‘품격과 천격’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싶다. “달이 영혼과 관능의 세계, 또는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암시한다면,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그리고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는 해설자의 설명에 의해서다. 그것이 더 이상의 상상을 불허한다. 그러고 보면 이때의 해설은 책 읽기에서 독毒 한 줄이다.
『달과 6펜스』가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Paul Gauguin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중년의 증권 브로커가 탈 없이 잘 살다가 느닷없이 화가가 되겠다고 처자며 직업이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집을 나가 버린다. 그는 파리의 뒷골목을 떠돌다가 태평양의 외딴 섬 타히티로 간다. 그 섬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문둥병에 걸려 장님이 되었지만 신비로운 그림을 완성하고 죽음을 맞는다는 줄거리를 갖는다.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했다 해도, 작가의 심정적 개입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서머싯 몸은 1874년에 태어났고 『달과 6펜스』는 1919년에 출판되었다. 작가의 나이 45세, 마흔의 한 중간이다. 이때 작가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소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 그가 몇 살에 집을 뛰쳐나갔던가? 작가와 소설 속의 주인공이 같은 마흔 중반이라는 사실은 이 소설과 전혀 관계가 없을까? 그냥 지나쳐버려도 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려본다.
도입부에서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예술가의 개성이 아닐까 한다. 개성이 특이하다면 나는 천 가지 결점도 기꺼이 용서해 주고 싶다.”(8쪽)고 했다. 이는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과 뻔뻔스러움을 용서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예술은 그런 부도덕과 뻔뻔스러움을 먹어야만 꽃으로 피는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소설의 끝에서 스트릭랜드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그림,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원성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그림이 그려진 “집에 불을 지른 다음 모조리 탈 때까지, 작대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떠나지 말라”(298쪽)는 유언을 남긴다. 그 유언을 그의 아내 아티가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걸작이 사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사라져서 더 위대한 걸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마저 작가의 개성이라는 보자기에 싸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또 어떤가? “사랑에 자존심이 개입하면 그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야.”(152쪽)라는 말이나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159~160쪽)는 문장에서 쉬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가의 사랑, 아니 스트릭랜드 사랑에 대해서 “애정에 대한 개념이란 개성에 따라 형성되기 마련이지만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한다.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에게도 자기 나름의 사랑법이 있을 것이”(160쪽)라고 한다. 예술에서 개성이라는 말에 그 어떤 일이라도 용서하고도 남을 가치가 정말 있기는 한가. 이는 결국 예술지상주의와 다름없다. “스트릭랜드는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긴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가 위대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221쪽)는 판단 때문이다.
『달과 6펜스』는 고전이다. 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단답형이 아닌 예술과 사랑의 개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술과 사랑이 궁금하고 예술을 사는 삶이 어떤가가 궁금해진다면 이 책을 펼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답은 없다. 이 책은 단지 생각을 더 깊고 넓게, 또 오래 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읽는 사람이 그 답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해준다. 그 짜릿한 경험을 맛보고 싶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을 더 깊게 해줄 다음 문장들에 나는 밑줄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글 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17쪽), “아스팔트에서도 백합꽃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물을 뿌릴 수 인간은 시인과 성자뿐이 아닐까.”(70쪽) 6펜스로는 살 수도 없고, 어쩌면 6펜스로 사고 남을 말이기도 하다.
---「1장 예술과 사랑 - 『The Moon and Sixpence』」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