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한 일이 뭘까.”라고 한탄하며 힘들어하는 개브에게 나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 중 하나(시카고 대학에서 우리는 거의 10년 전 만났다)를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땄으며, 법학 대학원도 졸업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게다가 맨해튼의 잘 나가는 법무법인에서 기업 변호사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경력도 있었다. 어머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팽개치고 델리를 열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개브가 화를 내며 대꾸했다.
“우리 어머니는 서른 살까지 뭘 했는지 알아? 아버지 도움도 없이 세 자식을 키우면서 자기 사업도 직접 운영하고 있었어. 거기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국이라는 나라로 이민 올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고. 이걸 다 서른도 되기 전에 해낸 거야.”
대신 장모 케이는 대학을 나오지 못했으니, 학위 분야에서만큼은 개브가 3대 0으로 앞서 있다고 말해줄까 했으나, 별로 듣고 싶어 할 것 같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p.24 보온진열대
“아, 그래. 그쪽도 출근해야지. 이중생활이 벌써 시작됐군.”
조지가 미소를 짓곤 칵테일을 다 마신다.
“그럴 작정인 거지? 이중생활 말이야. 분리되고 분열된 인생. 작은 충고 하나 하지. 생각보다 꽤 어렵고 힘든 일이 될 거야. 조심해야 하네. 늘 이 반쪽이 저 반쪽을 넘보고, 집어삼키려 할 테니. 투잡은 비실용적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묘기거든. 어리석은 시도랄까. 결국 한 쪽을 포기해야 할지도 몰라.”
“네, 조지.”
「파리 리뷰」가 아니라 델리를 중단하길 바란다고 얘기하지 않을까 기다리지만,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잔을 내려놓고 파티 준비를 위해 가버릴 뿐. 강에서는 여전히 짐배들이 애를 쓰고 있다.---p.50 투고 더미
다음날 보스턴의 부모님에게 전화해 우리 계획을 얘기한다. 부모님은 이상할 정도로 신나한다. 몇 달 전에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예상한 반응은 “안 돼, 벤! 그동안 받은 교육과 자란 환경을 생각해야지. 제발 부탁이다!” 같은 거였는데, 막상 부모님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정말 멋지구나!”
어머니는 우리가 화랑이라도 여는 것처럼 감격한다. 심지어 실내 장식을 도우러 뉴욕에 오겠단다. 걱정하는 건, 제대로 된 겨자 소스를 팔아야 하며 ‘몹쓸 저칼로리 탄산음료’는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다. 아버지 역시 불길할 정도로 낙관적인 반응이다.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야. 도시 하층계급의 삶에 대한 민속지랄까, 참여연구가 되는 거지. 조지 오웰도 접시닦이로 일한 적이 있잖니. 조지프 콘래드 역시 젊은 시절 배를 타고 해외를 떠돌았고.”
델리는 교환학생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는다.---p.62 장소가 제일 중요해
“이것 좀 세어봐.”
케이가 20달러짜리 한 뭉치를 건넨다. 돈을 세기 시작하자마자, 지폐들이 손가락 사이로 휙휙 빠져나와 사방으로 날아간다. 케이가 기겁한다. 우리는 서둘러 몸을 굽혀 돈을 줍느라 위험천만하게도 ‘로열 알파’의 현금통을 활짝 열어놓은 채 몇 초 동안 방치한다.
“다른 걸 해보자.”
장모가 말하며 스니커즈 초콜릿 바를 건네준다.
“내가 이걸 산다. 나를 손님이라고 생각해.”
스니커즈를 받아들고 금전등록기를 향해 불안한 발걸음을 옮긴다. 단추 위의 표시들이 고대 마야 상형문자 같다.
“문제 있어?”
입을 헤벌리고 멍청히 서 있자, 장모가 묻는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돌아서며 어깨를 움츠린다.
“얼마죠? 그러니까 이 과자가…….”
“몰라? 개브가 물건 값 목록 줬다고 하던데.”
우리 델리는 1천 종 이상의 제품을 파는데, 그중 3분의 1에만 가격표가 붙어 있다. 매일 쓰는 현금카드 비밀번호도 헷갈려하는 나한테 이건 무리다.
“그랬죠. 근데 제가 아직 값을 못 외워서요.”
“65센트.”
케이가 짜증을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어 어떤 단추를 눌러야 하는지 일러준다. 핵무기를 발사하기 위해 대통령이 취해야 하는 조치보단, 아주 약간 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현금통이 탁 튀어나와 열린다.
“와, 됐네요.”
나는 분위기를 좀 풀어보려고 농담을 던진다.
“이제 집에 가도 되겠는걸요.”
케이가 얼굴을 찌푸린다. 이게 면접이었으면, 난 떨어졌다. ---p.89 아마추어들
전형적인 복권 손님은 또 어떻고. 아침에 집을 나오자마자 버스에 칠 뻔하고 보니 버스 번호판 네 자리 숫자가 자기 어머니 생일과 똑같다. 그러자 옛날 어머니가 살던 동네의 가게에 가서 어머니가 살던 아파트 층수(9),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인물인 존 F 케네디가 죽은 년도(63), 어머니가 제일 좋아한 나머지 보다 돌아가신 텔레비전 프로그램 「판사 주디」를 방영하던 채널(2)을 조합해 복권을 긁는다. 이렇게 확고한 목표의식을 지닌 가슴 찡하고 감성적인 이?트를 수행하는 사람이 이것저것 사는 방탕한 쇼핑도 함께 일삼을까? 전혀 아니다. 그들은 숫자들을 몽땅 조합해 열여섯 장쯤 복권을 긁고 나선 계산대 옆에 놓인 오렌지를 멀뚱멀뚱 살핀다. “과일이 많이 묵은 것 같네.” 등의 촌평을 날리다, 퍼뜩 하나에 35센트나 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뱃속을 찌르는 허기에도 불구하고 또 복권을 달라고 한다. 이번엔 3과 5를 이용한 갖가지 조합으로 긁어본다. 그 와중에 다른 손님이 지나다니지 못하게 통로를 막고 선 것은 물론, 음량을 잔뜩 키운 휴대전화로 온 가게가 울리도록 통화를 한다.
“뭐라고? 뭐라고?”
어떤 복권 손님들은 아주 괴팍하고 요구사항도 많다. 그래서 내가 별명을 붙여주었다. 투덜이, 빽빽이, 휴지(화장실 휴지에다 번호를 갈겨써 입력해달라고 준 손님).---p.135 가루담배
맙소사. 나는 탄식을 내지른다. 한국 여자들은 다 이런가? 성실한 딸, 아내, 어머니 노릇을 하면서 힘든 일까지 하는 것으론 성이 안 차나? 친척들을 위해 집을 하숙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꽃꽂이 수강에, 교회 성경 교사에, 한국 음식 요리 비법(물론 엄격한 채식주의에 기반해서) 숙달까지 동시에 해치워야만 만족하는 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개브가 창고에 두었던 낡고 우중충한, 어깨에 뽕 넣은 재킷과 무릎까지 오는 회색 치마를 꺼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어휴, 당신은 얼마나 끔찍했는지 기억 안 나는가 본데. 나는 기억한다고. 하루에 열일곱 시간씩 창문도 없는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검토하고 밤에 집에 오면 수돗물에 밥 한 덩이 말아 먹고 잤잖아. 주말에는 내내 잠만 자다가 월요일 아침이면 그대로 일어나 사무실 가고. 사람 사는 게 아니었어.”
“혹시 증거 있어? 어디 적어놓기라도 했냐고. 정말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나는 전혀 그렇게 기억이 안 돼.”
좀비를 세뇌시키는 게 차라리 쉽겠다. 훼방을 놓으면 어떨까. 면접 본 은행에 전화를 해서 개브가 망해가는 델리를 운영하고 있다고 고자질하는 거다. 가게 하나도 건사 못하는 사람을 누가 뽑겠는가?
“이건 미친 짓이야. 당신 어머니랑 똑같이 굴고 있잖아.” ---p.231 무리들
“뭐가 좋아? 점박이 아니면 줄무늬?”
케이가 트로얀 콘돔 상자를 들고 묻는다.
“손님들이 뭘 더 좋아하지?”
돌아버리겠다. 이 여인은 자기 딸과 거의 사춘기 때부터 사귀어온 내가,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콘돔을 낚아채 두 종류 다 U보트에 던져 넣는다.
“다음으로 가죠.”
케이는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다음은 애완동물 먹이다. 여기선 별 일 없겠지. 그러나 내가 등을 돌리자마자 케이가 고양이 배설판 커다란 묶음 몇 개를 끙 하고 들어 U보트에 올린다.
“어라, 그러시면 안 되죠. 제가 할 일이란 말이에요.”
고양이 배설판은 젖은 깔개만큼이나 무거운데다 딱히 잡을 손잡이도 없다. 케이가 한국 슈퍼에서 집까지 힘겹게 들고 오는 40킬로그램 쌀 포대만큼이나 허리 건강에 위험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다 했어.”
케이는 대신 옆 구역으로 얼른 뛰어가서 종이 행주를 가져 오라고 부탁한다. 휴우. 바운티 휴지 제품만 한 구역 전체를 차지하는데,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리면 대단해 보여도 실은 마시멜로처럼 가볍다. 내가 그러는 사이, 케이는 또 무거운 제품들을 담아나간다(고양이 먹이엔 뭘 넣는지 납덩이보다 무겁다). 난 결국 별 도움이 못 되나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 케이는 누가 도와줄 때까지 30초를 못 기다리고 상당한 무게와 크기의 뭔가를 직접 옮기는 것이다. 이렇게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사람은 처음 본다. 가족들 전부 말리려 애를 쓰지만, 옆에서 꼭 붙들고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p.279 노동의 소외
드웨인은 가게에 총을 가지고 온다. 가게 인수 초기였는데, 늘 그렇듯 드웨인이 거칠게 놀던 시절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었다. 포크로 어떤 남자의 뺨을 찍은 이야기를 막 끝내고 나서였다.
“그럼, 벤은 뭘 가지고 다녀?”
“가지고 다니다니?”
“호신용 무기 말이야.”
나는 당황스럽다(얼굴에 박힌 포크의 모습만 머릿속에 선명했다). 가게에서 일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데다,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때에 호신용 무기 같은 것을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지금 돌이켜보면 좀 이상하지만). 쿠어스 라이트 됫병 가격도 외워야 했고 졸음을 쫓으려면 기운 차릴 것도 필요했다. 하지만 무기 같은 건 생각조차 못해본 순진한 남자로 얕보이기는 싫었다. 그래서 “오늘은 깜빡.”이나 “샐러드용 포크.” 비슷하게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드웨인은 즉각 “아무것도.”로 알아들었다.
드웨인은 기함했다. 마치 재개발로 평화롭기 짝이 없게 바뀐 브루클린이 아직도 한창 교전 중인 내전 지역이라도 된다는 투였다. 조만간 가게에 강도라도 들 것 같았다. 강도가 드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몇 번 드느냐가 꺹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순순히 내줄 것인가, 드웨인 식으로 대처할 것인가. 그 결과는 즉시 ‘전국 델리 강도 연합’인지 뭔지에 보고되어, 그들의 ‘밥’이 될 것이냐 아니면 어쩌다 한 번씩만 털릴 것이냐가 결정된다. 무기 준비를 안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드웨인은 뭘 가지고 있는데”
나는 물었다. 꼼꼼한 성격에 걸맞게, 드웨인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도 오싹해질 무기 목록을 하나하나 읊었다.
“곤봉, 별 모양 표창, 대형 칼, 사슬 채찍, 쌍절곤, 후추 스프레이…….”
이어 마지막에야 생각이 난 것처럼, 권총을 슬쩍 덧붙인다.
---p.301 문제적 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