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모리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코끼리라는 프레임 자체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프레임에 초점을 두어야 하듯이, 순수한 이타심에 초점을 맞추면 이기적인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쉬워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산업혁명의 토대가 된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핵심이 되는 주식회사의 발달은 어떤 면에서는 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켜주는 시스템이 주식회사 제도이기에 가능했다는 입장에서는(괴츠만, 2019, 401-420) 욕망의 제어가 적절한 선에서 제어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나모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중국의 고전에 속하는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기도 하다.
--- 「류제동│제4차 산업혁명과 불교의 기업가정신」 중에서
소태산은 발달하는 과학 문명에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의 정신을 우려하고 있다. 야스퍼스도 과학기술시대의 폐해를 구제할 정신문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제2의 차축시대를 기대한다. 소태산과 야스퍼스 모두 과학기술시대 및 산업 시대를 사는 인류에게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통해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참다운 문명 세계가 구축되길 희망한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물질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미래의 새로운 차축시대’인 ‘철학적 신앙’에서 찾았고, 소태산은 ‘정신개벽’에서 발견하였다. 앞서 살펴본바 소태산은 정신세력의 확장과 물질세력의 항복에 대한 구체적 길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제시하였다(정전, 21). 신앙과 수행, 정신과 물질은 상생(相生) 관계 속에서 인류문명의 개벽에 기여한다.
--- 「김명희│칼 야스퍼스의 ‘차축시대’를 통해 본 원불교의 ‘정신개벽’」 중에서
예수는 돈이 재물이 되어 맘몬으로 물신화하는 과정을 꿰뚫어 본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물신화된 과정은 부처가 가르쳐준 연기론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 화폐가 맘몬이 되는 과정에 마음이 개입되어 있다. 돈의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소위 귀금속(금)의 내재적 가치에 있다고 보는 본질주의 이론과 고전파들이 주장하는 노동가치에 있다고 하는 주장이 대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돈에 관한 본질주의 이론이나 노동가치론은 비록 제한적이지마는 유심론적이고 연기론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의 가치는 마음이 결정하는 주관적인 측면도 있다. 이것은 유심론적인 설명이다. 돈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처럼 유심론과 연기론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과 같은 현실적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심론과 연기론 모두 유효하고 필요하다. 그리고 유심론과 연기론은 상호 구별되지만, 동시에 상호 연결되고 작용한다.
--- 「권진관│돈과 재물에 대한 경전적 해석」 중에서
포콜라레의 공유경제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소외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했다. 이윤추구를 극대화화는 과정에서 인간은 기업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이윤창출이 그 중심을 차지했다. 노조와 기업의 경영진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최고 가르침인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존중’이다. 인간을 존중하는 기업, 이윤창출보다는 인간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기업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중심에 두면서 기업이 이윤창출을 내지 못한다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 이윤도 창출하고 인간도 중심에 오게 하는 기업, 공유경제는 그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 「김혜경│돈의 우상화와 천주교의 21세기 생명경제」 중에서
소비자본주의가 본격화되던 1990년대 후반, 한국기독교 공간에서는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바람직한 삶의 길이 ‘자발적 가난’인지 ‘깨끗한 부’인지를 두고 첨예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청빈론(淸貧論) 대 청부론(淸富論) 논쟁이다. 전자는 역사적 예수와 예수운동을 본받은 자발적 가난이야말로 기독교신앙에 합당한 삶이라고 주장했다. 후자는 부를 신이 준 축복으로 해석하면서 돈을 벌거나 사용하는 과정이 깨끗하면 기독교인으로서 부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돈 버는 과정이 깨끗하지 않다면 ‘청부’가 될 수 없다. 깨끗함에 위배되는 돈벌이는 도둑질, 도박, 투기 등 불로소득, 부정축재 등이다. 뿐만 아니라 깨끗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번 돈을 올바르게 분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번 돈은 신, 이웃, 자신의 몫으로 정확하게 배분해야 한다. 아무리 자신의 몫이 많다고 해도 신과 이웃의 몫을 탐하지만 않는다면 신앙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 「이숙진│소비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와 경제정의」 중에서
설문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권진관의 언급처럼, 전체적으로 개신교가 여타 종교에 비해 돈에 가장 민감한 경향을 지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종교기관 내에서의 ‘돈’에 대한 언급 횟수, ‘돈’에 대한 가르침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돈’과 관련된 기도의 횟수, ‘돈’이 종교 활동에 미치는 영향, 헌금과 교회 직분의 관계 등에서 개신교는 여타 종교에 비해 종교 생활과 ‘돈’의 관계성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베버(Max Weber)의 언급처럼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세상 내의 금욕을 주장하며, 이는 자본주의 정신과 상대적인 친화성을 유지하는 근거가 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상대적으로 돈에 대해 민감하고, 중요시하는 경향을 낳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개신교는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 속에서 이와 같은 돈과 관련된 담론을 계속해서 새롭게 형성해 왔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청부/성부론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종교들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상황에 맞추어 그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으로 돈에 대한 담론들을 생산해 온 것이 사실이다.
--- 「최현종│돈과 종교: 돈에 대한 종교인의 태도 및 담론 고찰」 중에서
상관계수 분석에 따르면, 본당 미사나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가톨릭 신도일수록 헌금(교무금)과 물질축복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신교 신도의 경우에는 교회 예배와 행사에 많이 참석할수록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신앙을 고려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교의 경우, 신도가 법회나 사찰 행사에 참여하는 횟수가 신앙생활과 물질축복의 관계에 대한 인식, 직업선택에 대한 신앙의 영향력 유무, 신앙 활동을 하는 데 ‘돈’이 영향을 준다는 인식, 헌금(보시)이 축복을 가져온다는 인식 등과 아무런 상관관계를 갖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불교에서는 법회를 비롯한 종교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신도일수록 성실한 신앙생활이 물질축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 「신익상│돈과 종교의 관계 지형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