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삶이 드러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며,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몇 푼의 돈의 가치보다 이웃·친구·가족, 더 나아가 공동체와 사회에 끼치는 가치에 주목하게 만든다. 보이는 영역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주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숭고한 가난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투명인간처럼 지각 불가능하고, 식별 불가능하고, 비교 불가능한 삶의 내재성이 가난을 통해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가난이 말하도록 하는 것은 삶이 말하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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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에서는 고립된 사람의 절절한 외로움·고독·고립의 독백이 배어 있다면, 가난에서는 연대와 협동에서 오는 맑고 향기로운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이 배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깨달음뿐만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가 이 생애에서 한 번밖에 없는 순간이라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에 따라 관계 맺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가난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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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우리를 공(空)으로 비워 그 안에 생명과 우주, 자연, 생명이 들어올 여지를 두는 참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는 가난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에서 얘기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가난은 벗어나려 하고, 극복하려 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 그 자체가 가난이다. 자연과 생명, 이웃과 관계 갖고 있는 비움과 나눔, 살림의 지혜가 바로 가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직면하게 되는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 제도와 시스템, 공공 영역의 중요성을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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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가난’은 성장도, 발전도, 번영도 없는 감소와 축소와 감속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채로운 영역들의 상호 의존과 연대망의 구성에 달려 있다. 시장이나 공공 영역 만으로도 안 된다.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필요하다. 엄밀하고 정교하게 자신의 프로그램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과 결합하여 브리꼴라쥬를 만들 능력을 갖추는 게 더 필요하다. 더불어 가난은 협동하는 가난, 연대하는 가난, 연결되는 가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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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 일하고, 소비하고, 노는 사람의 관점을 ‘풍요’의 준거점으로 할 때 느리게 움직이고 재생과 순환에 따라 아껴 쓰고 나누어 쓰는 사람들은 ‘비풍요’, 즉 ‘빈곤’의 영역으로 걸려들게 된다. 그런데 진정으로 풍요의 관점과 기준을 바꿀 때 우리는 더불어 가난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 풍요의 삶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세상은 이분법에 따라 획일적인 비교나 준거점 설정에 따라 작동하는 게 아니라, 다분법, 다방향성, 복잡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승인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발전, 성장, 개발의 논리는 하나의 획일적인 잣대로 세상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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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는 가난에 눈뜨는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허구상품들인 노동, 이자, 지대 등은 기능 정지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대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관계들은 더욱 더 선명해지고 명확해지고 있다. 가정, 살림, 돌봄 등의 핵심적인 개념들이 복원되었다. 더욱이 더불어 가난이 전반화되어 재난기본소득이나 감축, 검소 등이 대두된 것도 사실이다. 더불어 가난을 통해서도 사회는 재건되고 구성되고 작동될 수 있다. 가난의 사회가 사회 와해가 아니라 사회 복원과 보호에 있다는 점을, 우리는 코로나19 사태의 교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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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가난’은 욕망, 사랑, 정동이라는 활력과 생명 에너지가 더욱 충만하고 풍부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금욕주의가 갖고 있는 고귀하고 고결한 개인들의 자발적 가난의 좁은 길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난을 유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성 종교가 스스로는 찬양하면서도 실제로는 잘 따르지 않는 금욕주의라는 위선이 아니라, 생명 에너지로서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창조와 생성의 삶의 양식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이 더불어 가난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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