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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고르바초프 최후의 자서전

[ 양장 ]
리뷰 총점8.5 리뷰 8건 | 판매지수 96
베스트
사회 정치 top20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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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8월 08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40쪽 | 736g | 153*224*30mm
ISBN13 9788997201112
ISBN10 899720111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감수 : 김흥식
연합뉴스에서 초대 모스크바특파원과 문화부장, 북한부장, 논설위원,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임원 임기를 마친 후에는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를 지냈다. 동양통신 사회부 기자 시절이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직되었으며, 1988년 지금의 연합뉴스로 돌아와 기자생활을 계속했다. 이후 사회부, 외신부를 거쳐 모스크바특파원 시절 숱한 특종을 남겼다. 강원 회양에서 태어나 제물포고와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했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2000년 9월 21일에 쓴 일기)

라이사가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오늘은 아내의 묘소에 묘비가 세워지는 날이라 가족과 친지들이 아내의 무덤에 모두 모였다. 비석은 조각가 프리드리히 소고얀의 작품이다. 알록달록한 대리석 비석은 표면이 마치 꽃으로 장식한 돌판 같았다. 아주 큰 돌이었다. 비문은 이렇게 쓰여졌다.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1932년 1월 5일 태어나 1999년 9월 20일에 잠들다.’ 라이사를 빼닮은 젊은 여인이 몸을 구부리고 묘비에 야생화 다발을 놓았다. 벌써 1년이 지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1년이었다. 사는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여러 달 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딸 이리나와 외손녀 크세냐, 아나스타샤, 그리고 친구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라이사가 떠난 다음에는 몇 달 동안 강연 일정도 모두 중단하고, 그저 다차에 처박혀 있기만 했다. 그처럼 지독한 고독감은 전에는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라이사와 나는 50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늘 꼭 붙어서 지냈지만 한 번도 서로 지루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같이 있으면 우리는 그저 행복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둘이만 있을 때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서 말한 적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젊은 시절에 시작한 사랑을 끝까지 키워나간다는 언약을 굳게 지키며 살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했다. 라이사의 죽음에 대해 나는 너무 큰 죄책감을 느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왜 아내를 지켜내지 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온갖 기억을 다 되살려내 보았다. 우리가 겪은 일들이 나중에 라이사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런 양심도, 책임의식도 없는 사람들이 나라의 권력을 차지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내는 가끔 그 일을 입에 올렸고, 그러면 나는 늘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면 아내는 이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보면 나는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아내와의 마지막 시간이 된 9월 19일부터 20일 사이의 밤을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다. 아내는 1999년 9월 20일 새벽 2시 57분에 눈을 감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 없이 눈을 감았다. 서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아내는 자기 여동생 루드밀라로부터 줄기세포 이식수술을 받기로 한 날을 이틀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우리가 모스크바의 혼인등록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한 지 46주년을 닷새 앞둔 날이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내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도저히 아내의 죽음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이리나와 나는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붙어 앉아 하염없이 아내를 불러댔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소리쳤다. “여보, 자카르카, 가지 마, 내 말 들려?” (나는 집안에서 아내를 자카르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손을 꼭 쥐면 아내가 나의 애원에 응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라이사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앓아눕기 전에 아내와 나는 우리의 장래에 대해 수시로 이야기했다. 한번은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없으면 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어때요? 아마도 당신은 내가 죽으면 다른 여자와 재혼해서 살겠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누가 죽는다고 그래. 당신은 아직 젊어. 거울을 한번 보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못 들었어요? 당신은 너무 지쳐서 좀 쉬어야 하는 것뿐이라고.”
그러면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노인네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아요.” 손녀가 태어나자 얘들이 자기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를 놓고 우리는 머리를 짜냈다. 아내는 바불랴라고 불러 주면 좋겠다고 했다. 직역하면 ‘작은 할머니’란 말이다. 흔히 하는 것처럼 바부시카라고 부르면 너무 늙고 병든 할머니가 연상되어 싫고, 바불랴라고 하면 그나마 좀 젊고 생기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내는 우리가 서로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꿨다. 점점 더 불안해했다. “그만 하고 돌아가고 싶어요.” 여행길에 아내는 가끔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고 장거리 여행 때는 자기가 내게 짐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두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혼자 남겨 놓고 떠나면 더 슬퍼할 게 분명했다.
…그날 밤 딸 이리나와 나는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서서 울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2001년 1월 5일에 쓴 일기)

라이사의 생일이다. 살아 있으면 69세가 된다. 장래 이야기를 하면 아내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더도 덜도 없이 새로운 세기와 새천년이 시작될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아내는 새천년이 시작되기 석 달 전에 눈을 감았다. 아내는 2000년 새해를 영원히 기억될 방식으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그때까지 이리나와 손녀들은 파리 구경을 한 번도 못해 봤다. 그래서 우리는 2000년 새해를 아이들을 데리고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도시의 샹젤리제 거리로 가서 맞이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새해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그 끔찍한 일이 닥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리나와 아이들과 함께 파리 여행을 예정대로 했다. 라이사가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 준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노보데비치 묘지로 갔다. 꽃을 한 아름 안고 갔다. 정교회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밤에는 눈이 왔다. 나는 라이사가 제일 좋아하는 빨간 장미를 가져갔다. 그날 묘지에서 본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묘비를 덮은 희디흰 눈 위에 빨간 장미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벽에는 아내의 큰 초상화가 걸려 있다. 집안 곳곳에 꽃과 촛불이 장식되어 있고, 예쁘게 장식된 성탄 트리가 놓여 있고, 트리 향이 집안에 퍼졌다. 식탁에는 아내가 손님맞이 할 때 내놓곤 했던 음식을 차려놓았다. 시베리아식 펠메니 수프와 아방가르드 파이를 곁들인 러시아 디너였다. 크렘린 베이커리에서 만드는 파이인데, 아방가르드란 이름은 아내가 붙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선 채로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었다.
저녁을 마친 다음 서재로 갔다. 전등을 모두 끄고 창가에 섰다. 다차 마당에는 야간등이 켜져 있고, 우거진 숲 위로 소리 없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볼쇼이극장에서 공연하는 호두까기 인형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 가족은 매년 새해를 앞둔 제야는 볼쇼이극장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면 새해 선물을 주고받았다. 산타크로스는 대통령궁의 경비가 아무리 삼엄해도 어김없이 선물을 갖고 왔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떠들썩한 파티가 벌어졌다.
이런 기억들은 이제 모두 지나간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내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라이사는 러시아의 겨울을 무척 좋아해서 눈보라 속에서 밖으로 나가 걸어 다니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스타브로폴에 살 때부터 그랬는데, 한번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을 뻔한 일도 있다. 그런 습관은 모스크바로 와서도 바뀌지 않았다. 아내는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과 젊은 시절을 모두 그곳 시베리아에서 보냈다. 가족 모두 철도 노동자로 일했는데, 북부 우랄의 타이가 삼림지대에서 여러 해를 보내기도 했다.
그 시절 라이사와 제냐, 류도치카, 어린 세 자매는 양털가죽 코트에 돌돌 싸인 채 썰매에 태워져 이사를 다녔다. 길고 긴 시베리아의 겨울밤 가족은 펠메니를 끓여 자루에 넣어 바깥에 내놓았는데, 그러면 펠메니는 꽁꽁 얼어붙었다. 펠메니는 라이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아내의 마지막 날들이 생각난다. 아내는 살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고,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꿋꿋이 견뎌냈다. 나는 눈뜨고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견디지 못할 지경이면 아내는 나와 딸의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도저히 해답을 구하기 힘든 물음에 답을 구하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7월 19일 의사가 진단을 내리고 아내를 병실로 데려갈 때 나도 따라 들어갔다. 내 눈을 쳐다보면서 아내는 이렇게 물었다.
“의사가 뭐라고 해요?”
아내의 상태를 알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심각한 혈액병이라고 해요.”
“이제 끝인가요?” 아내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아니요. 내일 독일로 가서 진찰을 더 받아볼 예정이오. 그래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다음 치료 방법을 정하기로 했어요.”
라이사의 병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우리는 뮌스터로 날아갔다. 9월 21일에 돌아올 때 라이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승에서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우리의 삶에 대해 책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로서는 너무 쓰기 힘든 책이었다. 이 책에는 나와 우리 부부가 살아 온 삶에 대한 회고와 추억이 담겨 있다.--- 「프롤로그」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크렘림의 권력다툼)

종말은 급속도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당서기장과 소련최고회의 의장이 정상적으로 직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체르넨코는 업무는 고사하고 말하거나 호흡하기도 힘들어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자리를 모두 내려놓고 병간호에만 전념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산적한 난제로 정말 힘들게 된 국가 경영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아프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육체적으로 업무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국가를 지도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권력 이양에 있어서 정상적인 민주적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런 시스템이 아니었다. 당시 소련 권력 시스템은 설사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이 권력 피라미드의 정상을 차지해도 무방할 정도로 독특한 자체 논리에 의해 움직였다. 누구도 감히 이 법칙을 침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건강하지 않은 시스템이 빅토르 그리신을 비롯한 몇 명의 지도자들의 노력에 의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권력을 둘러싼 온갖 추악한 행태가 하루아침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1985년 2월에 치러진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 선거 기간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러 해 계속돼 온 전통에 따라, 정치국원들이 일종의 의식처럼 선거일 전 날 저녁에 각자 모스크바 선거구에서 유권자들과 만나는 행사가 열렸다. 연설 순서를 놓고 그토록 사력을 다해 다투는 것은 처음 봤다. 모두들 마지막 순서인 당서기장 바로 앞 차례에 연설하고 싶어 했다. 늦게 연설하는 사람일수록 당 서열이 더 높다고 여기는 게 유권자들의 일반적 관측이다. 그래서 통상 마지막 연설자인 당서기장 직전에 연설한다면, 그 사람은 당서기장의 최측근 대우를 인정받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거는 2월 24일로 예정돼 있었고,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선거운동은 모두 끝난 시점이었다. 체르넨코는 참석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모임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정치적 파장을 최소한으로 줄일 묘안을 짜낸 끝에 내가 나서서 서면 연설문을 체르넨코로부터 받아오게 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런 다음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그 연설문을 낭독할 모임을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당서기장의 연설문이기 때문에 그 모임에는 당중앙위 대표자가 참석토록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 놀랍게도 그리신이 개입해 체르넨코와 개별 면담을 가졌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무례한 일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엄청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일로 있어서는 안 될 정치적 혼란을 불러왔지만, 그로서는 호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일을 벌인 것이었다.
물론 그리신 혼자서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고르바초프를 저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지도자들은 그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차기 지도자는 ‘제대로 된 인물’이어야 한다며 체르넨코 측근들이 특히 그리신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 체르넨코 사후에도 자기들이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와 함께 소수이기는 하지만 정보 분야 일부 인사들이 그리신을 괜찮은 인물로 ‘그리는’ 작업을 했다.
정치국과 서기국이 내 지휘 아래 있었기 때문에 나를 건너뛰기 힘들다고 판단한 그리신은 내게 전화를 걸어, 당서기장의 지시를 받아 자기가 모임을 주선해 체르넨코의 연설을 유권자들에게 대독하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체르넨코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대신, 그의 보좌관들에게 전화로 그리신의 말이 사실이냐고 물어 보았다.
2월 22일, 소련공산당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자격으로 그리신이 유권자들과의 모임 장소에서 체르넨코의 연설문을 낭독했다. 나는 예고르 리가체프, 안드레이 그로미코, 미하일 지미야닌, 바실리 쿠즈네초프와 함께 연단에 앉았다. 그런 우스꽝스런 거짓 행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속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신은 특유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어투로 연설문을 읽어나갔다. 나름대로 생동감과 열정, 영감을 불어넣겠다는 노력을 보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체르넨코의 마지막 뜻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걸 저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신이 벌인 코미디는 그게 다가 아니고 아직도 두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체르넨코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모습을 공개하고,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는 당선증도 교부받도록 되어 있었다.
2월 24일에 투표함이 체르넨코가 입원한 병실 바로 옆방으로 옮겨졌고, 투표장면이 어디서 이루어졌는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투표함이 있는 방으로 옮겨진 다음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투표한 체르넨코는 끔찍한 몰골에다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였다. 그리신, 당서기장 보좌관 빅토르 프리비코프, 모스크바 시당 쿠이비세프 구역위원회 제1서기인 유리 프로코피에프가 옆을 지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신은 마침내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 어쨌든 텔레비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당서기장의 건강이 양호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체르넨코의 측근이라는 자들이 벌인 시니컬하고 부도덕한 ‘신격화 도박’이었다. 그들이 실제로 가진 것이라곤 추악한 출세욕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이 병약한 지도자는 대의원 당선증을 교부받은 후 다시 한 번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그것을 읽어야 했다. 구부정한 노인이 두 손을 벌벌 떨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원칙과 사심 없는 봉사를 다짐하는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와중에 당선증이 그의 손에서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번은 실제로 바닥으로 넘어질 뻔한 그를 아카데미 회원 예브게니 차조프가 겨우 붙잡았다. (차조프는 저명한 심장병 전문의로, 소련보건부장관이자 크렘린 지도자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제4총국의 책임자를 여러 해 지냈다.) 물론 그런 장면은 텔레비전에 비치지 않았다.
차조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면이 연출됐는데 어느 의미에서는 체르넨코 본인의 동의와 희망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그리신 일당이 체르넨코를 그렇게 부추겼다. 이런 코미디는 2월 28일에 벌어졌고, 체르넨코는 결국 3월 10일 사망했다.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서는데 차조프 박사로부터 체르넨코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곧바로 티호노프를 비롯한 정치국원들에게 알려, 밤 11시에 정치국 회의를 열기로 했다. 협력의 필요성 때문에 그로미코를 만나기로 했다. 같은 정치국원으로서 어차피 우리 앞에 놓인 책임감이 너무 컸다.
그로미코는 세레메티에보 공항에 가 있었다. 우리는 그의 차에 연결된 내부 보안 전화로 통화했다. 나는 체르넨코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 밤 11시에 정치국 회의를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회의 시작 30분 전까지 회의장으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약속한 대로 둘이서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 일어났고, 그러니 우리가 정말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잘못하면 큰일 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변화를 원합니다. 지금도 늦었어요.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습니다. 어렵겠지만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힘을 합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로미코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지의 평가에 동의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합의가 이뤄진 겁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로미코나 나 두 사람 모두에게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사태 판단에 뜻을 같이 하면서 서로 조금씩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그날 합의는 어려운 결정이었다. 전에도 이런 문제를 놓고 둘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지만, 어느 한쪽 누구도 결정적인 속내는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두 사람이 더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서로 뜻이 통했던 것이다.
3월 10일 밤 11시에 정치국원과 서기들이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나는 회의를 시작하고 경과를 이야기했다. 모두들 일어서서 묵념을 올렸다. 그런 다음 차조프 박사가 체르넨코의 사망과 관련된 의학적 소견을 설명했다. 우리는 장례일정을 확정짓고, 이튿날인 3월 11일에 정치국 회의와 당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소집키로 했다.
리가체프, 당중앙위 총무부 책임자인 클라브디 보골리보프, 국방장관 세르게이 소콜로프에게는 철도부와 공군의 도움을 받아 중앙위원들이 제 시간에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정치국원 전원을 포함시킨 장례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장례위원장을 정하는 데 있어서 작은 걸림돌이 있었다. 관례대로라면 새 당서기장이 전임 서기장의 장례위원장을 맡도록 돼 있었다.
그리신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장례위원장 문제 가지고 머뭇거릴 게 뭐 있나요? 모든 게 명백한데. 미하일 세르게예비치(고르바초프)가 맡아야지요.” 그 말이 하나의 새로운 신호탄이 되었다!
나는 서두르지 말자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이튿날 오후 2시에 정치국 회의, 5시로 당중앙위 전체회의 소집 시간을 정했다. 나는 남은 이틀 반 동안 모든 문제를 심사숙고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을 생각해 보라고 모두에게 말했다. 정치국에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내용을 당중앙위 전체회의에 붙이도록 돼 있었다.
당중앙위 관료들이 긴급 호출을 받고 모스크바로 속속 모여들었다. 보고서 작성 작업을 맡길 여러 그룹을 만든 다음, 나는 바딤 메드베데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그리고 내 보좌관인 발레리 볼딘과 함께 내가 전체회의에서 행할 연설문 컨셉을 정했다.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당서기장 재임기간은 불과 13개월이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과제는 새 당서기장 후보를 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 오가는 정보를 모두 다 들어 보았다. 가능한 후보로 내 이름이 점점 더 자주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능성은 높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가 봐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선은 정치국과 서기국에 부여된 업무 처리에 매달렸다. 이를 통해 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사람들을 다루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사람들도 나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몇 음모가들의 희망사항과 달리, 내가 유력한 후보라는 분위기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 「체르넨코의 마지막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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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거인의 너무도 인간적인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소중한 책이다. 일생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둘러싸여 지냈으면서도 내면에 이토록 따뜻한 인간적인 향기와 가치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고르바초프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한소(韓蘇) 수교와 소련의 88 서울올림픽 참가라는 역사적인 일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보다 앞서 일어난 베를린장벽 개방과 동유럽의 대변혁 역시 마찬가지다.
-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 초대 주 소련 대사)

너무도 감동적이고, 지혜와 영감을 주는 책이다. 요즘은 이와 같은 용기와 인간적인 품위를 갖춘 지도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고르바초프 자서전은 격변한 현대사의 흐름을 추적해 보여주는 거대한 한 편의 서사시이다. 그러한 변화를 앞장서서 주도한 한 인간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감동적으로 그린 책이다.
-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고르바초프의 새 자서전에는 특히 그동안 우리가 들어보지 못했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유년시절 이야기와 아내 라이사 여사와의 애틋한 추억이 소개돼 있다. 우리가 몰랐던 고르바초프의 인간적인 면모와 그것이 그가 대중들에게 보인 정치적인 면모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가늠케 해 주는 소중한 책이다.
슈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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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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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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