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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시간 여행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서 (큰글자도서)

한성백제 시간 여행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서 (큰글자도서)

리더스원 큰글자도서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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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80쪽 | 198*293*20mm
ISBN13 9791190429030
ISBN10 119042903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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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의 서울을 찾아가는 여행

누구나 다 알만한 이야기겠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에는 시대마다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등장하기 전에는 또 다른 존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흔적이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땅 속에 다양한 두께의 역사층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 바빠서 잊고 살 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중심이자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도 여러 시대의 흔적들이 쌓여 있습니다. 과거의 유적들은 옛 모습 그대로, 혹은 그때와는 달라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과거의 유적들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과거의 전통들을 기억하고 이를 우리의 정체성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한 국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으로서 ‘서울’의 정체성은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제로 1994년 서울시에서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행사를 거창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이 들썩 거릴 정도로 큰 행사의 한쪽에서 조용히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울이 우리 역사의 수도가 된 것은 조선 왕조가 처음이 아니라 2,000년 전의 백제부터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벤트에 목말라 하던 서울시와 일반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이러한 주장은 커다란 호수에 떨어진 자갈 한 개 정도의 파문만 남기고 지나갔습니다. 결국 서울의 역사는 600년으로 축소되었고, 이후 계속된 대규모의 개발은 조선시대 이전의 유적들을 파괴하거나 파괴될 위험에 놓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백제부터 내려온 중심지로서 서울의 역사상을 복원하기 위해 역사연구자들을 비롯한 뜻있는 분들은 쉼 없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개발로 파괴될 위기에 처했던 풍납토성의 재발견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백제의 방어용 성 정도로 알려졌던 풍납토성의 본격적인 발굴로 백제 도성의 웅장함과 백제 도성 사람들의 화려한 생활모습이 하나, 둘씩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밑바닥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백제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풍납토성 이외에 다양한 한성시기 백제기의 문화유산들은 서울시의 개발 과정에서 제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또한 거대 도시 서울이라는 두껍게 칠해진 화장 밑으로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도 많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는 백제의 유적들은 왜 이렇게 홀대를 받았을까요?
그동안 서울은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경쟁의 장이었습니다. 남보다 한 발이라도 더 앞서려는 노력은 빠른 경제 발전을 가져왔지만 뒤처지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물론 과거 유산의 전승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늘을 즐기자’에 몸과 정신을 맡긴 채 살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풍요로운 사회의 안쪽에서 팍팍하고 빈곤한 개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 중 하나인 백제인의 얼굴을 되찾자는 노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서울이 ‘사람 사는 곳’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풍부한 인간성을 가져야 합니다. 내 속에 다양하고 풍부한 인간성이 있어야 타인에 대한 이해도 넓어집니다. 한성백제 시간여행은 백제인이라는 과거 사람들을 이해하는 여행입니다. 백제인의 넉넉한 마음과 타인을 이해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서울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간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1. 백제의 시작

ㆍ백제의 건국 세력은 누구?
가까이는 1,500년 전, 멀리는 2,000년도 훨씬 전에 있었던 나라들에 대해서 우리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들과 땅 속 혹은 땅 위에 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연구하여 수천 년 전 과거의 모습을 그려볼 뿐입니다. 그나마 이러한 추정도 실제 과거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대충대충 역사극을 만들어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전해지는 역사책 속의 기록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어림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에 대한 기록으로는 우리 역사책으로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고, 중국의 역사책에 한반도와 그 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중 백제를 비롯한 삼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헌 자료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입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의 건국 이야기를 볼까요?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인데, 이 사람은 난을 피하여 북부여에서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이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를 온조라고 불렀다. (중략)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북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기원전 18년이다.

위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지금의 서울 지역에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북부여·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세력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또 다른 기록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라는 기록은 백제 왕실의 성씨인 ‘부여’씨가 부여 계승 의식에 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5세기 개로왕이 중국 북위에 보낸 국서에도 부여 계승 의식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를 같은 조상으로 두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국가 발전 과정에서 친선 관계가 아닌 경쟁 관계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중국측 기록에도 백제와 고구려가 같은 부여 계통임을 보여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백제의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백제의 왕실이 부여계이다”, “백제국이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마한의 옛 땅에 세워졌다” 등의 기록들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 고구려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줍니다.

ㆍ온조와 비류는 친형제인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졸본왕의 둘째 딸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생 온조를 중심으로 하는 백제 건국 이야기 뒤에 조그마한 글씨로 붙어있는 형 비류 이야기는 약간 다릅니다. 비류 이야기에서는 두 형제의 어머니가 소서노이고, 친아버지는 우태(優台)입니다. 그리고 주몽은 우태가 죽은 후 과부가 된 소서노를 왕비로 삼아 온조와 비류의 양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소서노 세력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같은 기록 속에 온조와 비류 두 형제의 친아버지를 다르게 쓰다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역사학자들이 이런 기록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역사 기록이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을 수도 있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기록도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온조와 비류가 진짜 주몽의 아들이라는 기록의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즉 비류와 온조는 친형제라기보다는 각각 자신의 출신을 부여와 고구려라고 내세운 독자적인 정치 집단의 우두머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비류와 온조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비록 친부인지 양부인지 헷갈리지만) 백제 세력이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라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후대에 만든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가설을 조금 더 확대해 봅시다. 비류와 온조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온 세력인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온조가 한강 유역에 거점을 둔 소국인 십제국을 건국하고,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비류국을 건설한 각각 독자적인 세력이었습니다. 이후 조그만 소국 단계의 십제국과 비류국이 통합되어 연맹왕국 단계의 백제국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제국과 비류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백제국을 주도했을까요? 『삼국사기』 기록이 온조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바로 정답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미추홀에 나라를 세운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온조의 위례성으로 흡수되었고, 비류는 미추홀에서 후회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후 온조는 비류가 이끌었던 백성들을 모두 받아들여 나라의 이름을 십제국에서 백제국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을 보면 십제국과 비류국의 통합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온조의 십제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조와 비류의 후손들은 서로 권력을 놓고 다투기보다는 모두 왕족으로서 이후 백제의 중심 세력으로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 본문 중에서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학계가 생산한 역사연구의 성과를 일방적으로 시민대중에게 주입하던 시기는 지났다. 전문 연구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역사 관련 자료에 접할 기회가 늘어났고, 해외여행의 기회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유적 답사의 기회도 늘어났다.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얻은 정보를 종합하여 인터넷에서 나름의 역사지식을 뽐내거나,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역사연구 성과를 대중과 함께 향유한다는 대의를 고려하면 지극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더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인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은 난폭한 주장이 횡행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논리적 주장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현상을 보면서, 학계도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일반 시민들이 궁금해 하는 주제가 아닌 연구자들의 입맛에 맞는 주제, 도대체 이런 연구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주제를 둘러싼 “그들만의 리그”가 반복되면서 역사에 관심이 높은 많은 시민들은 역사연구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 틈을 메워줄 수 있는 인력은 역사소설가, 역사관련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제작자,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유산 해설사 등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미래의 역사향유집단인 중등학생들을 직접 교육하는 역사교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학계가 생산해 낸 딱딱하고 재미없는 역사연구 성과에 재미와 감동을 더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필자인 김진호선생은 이러한 고리 역할을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김선생을 처음 만난 때가 2000년 봄이었으니 이미 20년이 되어 간다. 그 사이에 우리 둘은 다양한 작업을 함께 해 나갔다. 중등 역사교육에서 과다하게 표출되는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짚어 보거나, 고대의 고분, 성곽, 제방 등에 담겨져 있는 전통 과학기술 원리를 추출하는 작업이 대표적인 예이다. 2012년에 김진호선생이 펴낸 “과학이 깃든 고대 고분”이란 책은 역사와 과학을 접목시키고, 학계와 청소년을 소통시키는 역사과학 여행이었다. 7년의 시간이 흘러 이번에 출판하는 이 책은 한성백제라고 하는 역사적 대상물을 대상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올라가는 역사여행이다. 김진호선생의 학문적 역량이나 학생들에 대한 애정,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는 진취적 마인드를 고려할 때, 이 책을 통하여 여러분은 분명히 성공적인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 권오영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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