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코트를 입으라고 하면, 이때다 하고 너무 낡았다느니, 이제 작다느니, 지퍼가 망가졌다느니 하면서 그 옷의 나쁜 점만 늘어놓을 것이다. 슬쩍 눈치를 봐서 푸른색 코트를 입으라고 했다간, 단추가 하나 떨어졌다거나 소매가 뜯어졌다고 내게 잔소리를 할 것이다. 자. 현명하자, 신중하자. “바바리 입으렴.” 하고 조그맣게 말해본다. 벼락. “말도 안 돼! 바바리 입고 다니는 애가 어디 있어!” --- p.18, [아침] 엄마의 일기 〈그럼 아무것도 입지 말고 가!〉 중에서
빨리, 코트, 재킷, 아무거나, 빨리. 다른 애들처럼 나도 멋진 잠바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멋은커녕, 내 옷은 온통 사촌들이 물려받고 물려받아서 입다가 내 차례까지 온, 유행이 한참 지난 낡아빠진 것들뿐이다. 그러나 이런 옷장의 실태에 대해서 얼핏 빗대서 얘기라도 할라치면 언제나, 내 옷장이 얼마나 터져나갈 듯이 가득 찼느냐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 --- p.25, [아침] 딸의 일기 〈옷이 많으면 뭐해? 유행이 다 지난걸!〉 중에서
한적한 시골 마을에 도착. 주차를 한다. 딸은 기지개를 켠다. 경치가 너무나 좋다. 산에 오르면 사방으로 바다가 보인다. “얘들아, 너무나 아름답지 않니?” 대답이 없다. …… 딸아이의 말투는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계속 바뀌지 않고 있다. 신랄함, 귀찮음, 비아냥거림, 표독스러움, 쌀쌀맞음 등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말투. 이해가 안 간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괴물단지를 키우고 있는 걸까? --- p.109, [일요일] 엄마의 일기 〈내가 괴물단지를 키우고 있는 걸까?〉 중에서
공부 같은 게 아예 없다면 나도 ‘좋은 공기’ 쐬러 산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난 사실은 산에 가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책을 읽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일고의 가치도 없다. 내일은 일요일. 일주일 중에서 늦잠을 잘 수 있고, 침대에 뭉그적거릴 수 있고, 시간 넉넉히 잡고 숙제를 할 수 있는 단 하루뿐인 날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렇게 꿈 같은 계획을 포기하고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산에 가서 걷자는 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이다. --- p.113, [일요일] 딸의 일기 〈일요일, 내 소중한 하루가 망가지다니!〉 중에서
딸아이는 온갖 청바지를 다 입어본다. 벨트가 맘에 안 든다, 주머니가 밉다, 너무 꼭 낀다, 너무 안 낀다, 혹은 너무 길다, 너무 짧다. 내가 보기엔 눈곱만한 차이도 없다. 난 지친다. 딸애는 화가 나서 죽으려고 한다. 내가 도대체 판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엄마는 이렇게 형편없는 옷이 어떻게 나한테 어울릴 수가 있다는 거야?” “다 너한테 잘 어울려. 진짜 내 속마음을 말하라면 말이지, 근데, 여기 있는 거 다 합쳐도 네 옷장 속에 든 것만 못하다.” --- p.160, [쇼핑] 엄마의 일기 〈내가 보기엔 눈곱만한 차이도 없는걸〉 중에서
유행은 중요한 것이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어야 몸과 마음이 다 편하다. 옷은 내 신체적인 결함을 가려줄 수 있는 제2의 피부다. 콤플렉스여 안녕. 그러나 우리 엄마 같은 엄마 밑에서 살면 꿈을 꿀 수가 없다. 엄마는 필요 이상으로 1상팀이라도 쓰는 걸 지독히 싫어한다. 그런데 엄마랑 나랑은 ‘필요’라는 개념이 다르다. …… 엄마는 일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시절 가격들에 대해 향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꼭 할머니처럼 이렇게 말하는 때가 많다. “요샌 뭐든지 너무 비싸.”
--- p.167, [쇼핑] 딸의 일기 〈영화 보러 갈 때 입을 옷을 오늘 꼭 사고 말 거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