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님, 종점입니다.”
버스의 배려는 여기까지였다.
이제부터 철저히 두 발로만 이동해야 한다.
텅 빈 들판이 말없이 나를 맞는다.
거대한 환영 인파보다 오히려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태초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생산을 해 왔을 그 들판이
모태(母胎)처럼 위대해 보였다.
인간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대자연은 그렇게 첫날
첫 내딛음부터 나를 압도했다.
저 들판의 끝이 우주의 끝일 것 같았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우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p.25
2) 상처 없는 나무는 없었다.
가지가 찢긴 나무, 몇 바퀴나 뒤틀린 나무, 칡넝쿨에 감긴 나무, 혹이 무수히 난 나무, 밑동에서 새싹을 틔우는 나무,
아문 상처가 수없이 많은 나무…….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숲을 이루고 있었다.
우분투
정신의 원조일까?
상처를 영광의 훈장인 듯 당연하게 여기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강인한 나무들이 대견했다.
안온한 환경에서 자라는 화초의 유약함과 비교되었다.
--- p.70
3) 자연의 이치는 알수록 신묘하다.
꽃과 벌이 상생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자연스럽다.
주기만 하는 꽃,
받기만 하는 벌.
주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데 상생이 된다.
부모와 자식처럼.
인간들이 이런 지혜를 터득한다면
전쟁도 범죄도 필요 없을 터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꽃과 같은 존재는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다.
태양, 바다, 바람, 구름, 비, 흙, 나무, 향기, 공기…….
언제나 부담 없이 누리기만 하면 된다.
--- p.120
4) 맛있는 과일을 먹으며 문득 궁금했다.
나무는 왜 자신에게는 아무 필요도 없는 과육을 이토록
정성 들여 만들까?
씨앗만 만들면 될 텐데…….
궁금증을 파고들다가 무릎을 쳤다.
아하!
씨앗만 떨어뜨려 놓으면 번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토록 정성스레 과육을 만드는 것이었구나!
결국 가장 이타적인 것은 가장 이기적인 것이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상생인 것이다.
불현듯 나무가 스승처럼,
현자처럼 존경스러웠다.
그날 이후
과일의 씨를 가능한 멀리 들고 가서 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 p.165
5)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운 날이었다.
하얀 왜가리 한 무리가 여유로운 날갯짓으로 산을 넘는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인간이 갖지 못한 특별한 장점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퍼뜩 떠올랐다.
놀랍게도 인간은 새보다 월등히 자유로운 게 있었다.
생각과 시간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만으로 언제든지 오갈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리라.
그렇다.
날개를 펴야 날 수 있듯이 생각을 펼쳐야
그 장점을 느낄 수 있다.
--- p.218
6) 초지진에서 다시 근대 역사를 돌아보고
강화초지대교를 건넜다.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 50km’의 이정표가
대장정이 끝났음을 알게 했다.
초보 도보 여행자가 무사히 전국 일주를 마치다니,
기적이었다.
순간 뭔가가 꾸물꾸물 다가오는 것 같았다.
길이었다.
그동안 걸어온 길들이 꼬불꼬불 다가와
나를 품고 어깨를 토닥거리며 격려했다.
수고했다고,
기쁘다고,
앞으로도 동행하겠다고.
--- p.229
7) 무엇이 나를 멈추게 했을까?
자연은 광대한 우주였다.
잰걸음에는 숨겨 놓았던 신비로운 모습들을,
멈춰 서는 순간 겹겹이 풀어 보여주었다.
풀밭인 줄 알았는데 온통 꽃밭이었고,
꽃마다 진지한 삶의 현장들이었다.
삶과 죽음은 맞물려 있었다.
식물과 동물의 아름다운 상생의 관계도 있었다.
벌과 나비들의 식량 창고인 꽃도
자세히 보면 진딧물들의 생존을 위한 번식터였다.
--- p.232
8) 예기치 않은 호의를 접하면 감동이 밀려온다.
그 순간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배낭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평생 이렇게 많은 감동을 날마다 느끼며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길을 떠나왔기에,
낯선 세상으로 들어왔기에 느낄 수 있는 축복이었다.
평범한 이웃들이 베풀어 준 배려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 분 한 분이
잊을 수 없는 분들이었다.
담장 밑에 홀로 피어 뜻밖의 기쁨을 주는
한 송이 꽃과 같은 분들이었다.
--- p.236
9) 22주 153일간 얼마나 많은 시가 나를 반겼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어떻게 상황에 딱 맞는 시들이 곳곳에서 툭툭 튀어나오는지.
내 안의 시들이 그토록 많은 곳에서 짝을 만나다니.
만나자마자 불꽃처럼 사랑에 빠지다니.
창조주의 섭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신묘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때로는 사람에게서, 때로는 꽃에서, 바람에서, 파도에서,
포말에서, 새에게서, 등대와 어둠에서, 길을 잃었던 산속에서,
눈 속에서, 빗속에서, 여명에서, 황혼에서, 고목나무에서,
갈라진 바위에서, 돌멩이 하나에서도.
곳곳에 시는 숨어 있었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의 특별한 만남을 위해
첫사랑을 잊지 못하듯 지금도 불쑥불쑥 그리움으로 피어났다.
어찌 쉽게 잊힐 수 있단 말인가?
---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