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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제 그만 패배하기로 하자

우리 이제 그만 패배하기로 하자

시인동네 시인선-133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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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9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27*203*20mm
ISBN13 9791158964887
ISBN10 1158964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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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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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서리에 국화향이 더 꼿꼿해졌습니다
마당가 심은 대추가 다 떨어졌군요

오전에는
지난밤 내린 비로 쓰러진 국화 단을 묶어주고
더러는 상처를 핥듯
대빗자루로 가을 마당을 쓸었습니다

메아리처럼 몰려가는 새털구름이
어제보다 몇 걸음 더
남쪽으로 내려갈 듯합니다

오십이 넘어도 세상을 모르겠다며
아직도 출가를 꿈꾸는 몹쓸 날들입니다
--- 「산문(散文)」중에서


흰 눈에,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룬
그해 겨울 원대리에 갔던 것인데

겨울바람이 목을 파고들어 핑크뮬리 같은
연분홍 목도리를 둘러주던 당신은

그 후 여러 날
목도리에 배인 그의 체취를 맡고
또, 맡았다고 하는 것인데

치자꽃은 유백색 꽃빛만큼 향기를 내고
천리향은 천리나 떨어진 곳에서도
그를 알아보게 한다는

칡꽃보다 진한 라일락 향기처럼
애인의 은밀한 곳에 냄새 맡고 알아내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연인들은 사과를
주고받아 겨드랑이 넣어 땀내가 배이면
그것을 애인에게 주었다고 하지

살 냄새, 그 체취만큼 사랑 감옥에 갇히게 하는
악마의 연애는 없다면서
--- 「다시 중독(中毒)」중에서


해 질 무렵, 게르 위로 피어오르는
아르갈의 연기를 보는 것처럼
초원의 야생마가 달리다 멈춰 서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바람 냄새를 맡는 것처럼
하룻밤 지세우려는 부르테치노의
타이가 숲에 울리는 푸른 늑대 울음처럼
초원의 바람에게 길을 물어
그 길에서 돌아온 여행자에게
마유주 한 잔 건네는
그 곡진함이란
내 속, 깊게 숨어든 그대여
왔던 길이 멀어져 아득해져도
내게도 중심 하나 생겼음을 기억하시라
--- 「나의 푸른 몽골 늑대」중에서


도꼬마리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들녘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옷에 붙어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돋쳐 있는
그 열매를 까보셨는지요
도꼬마리는 두 개의 다른 씨앗이 있어
큰 씨앗은 이듬해 봄, 싹을 틔우지만
작은 씨앗은 조건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가을 들판에 그 흔한 명아주도
검정색 씨앗은 이듬해 봄, 싹을 틔우지만
갈색 씨앗은 생육환경이 될 때까지
땅속에서 잠을 잔다는 것을
조건이 맞을 때까지 기다리는 씨앗과
바로 싹을 틔우는 씨앗
멀리 날아가는 씨앗과 그렇지 않은 씨앗
어찌하여 봄 들녘의 풀꽃들은
제 가끔 싹을 틔워도
기회를 늘려 함께 사는 것을 알았을까
경쟁은 선(善)이다
서로 물어뜯어라
가리단죽하며 말하는 이여
생명으로 가득한 봄 들판은
잠자는 씨앗들로 가득하고나
--- 「도꼬마리 씨앗유성기업 한광호 열사를 추모하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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