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1999년에 할 일을 잃었다. 공부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오다가 생태학으로 대학원을 수료하게 되었지만, 그간 이어온 공부가 내 공부 같지가 않았다. 그때부터 동양의 고전들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확실히는 몰라도 내 공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양의 학문은 사고방식 자체가 서양학문과 달랐다. 나는 동양의 사고방식이 성공적으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가에 의문이 났고, 곧 한의학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생겼다.
한의대에서 겪은 한의학은 서양학문의 사고방식과 동양학문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반성 없이 두 가지가 섞여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나는 이미 서양학문은 충분히 겪었던 터라 쉬운 길이 아니더라도 원래 모습의 한의학을 하고 싶었다. 한의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단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먼저 이해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죽을 때까지 한의학에 목마를 것이라는 직관이 들었다.
한의학 공부의 관건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한의학이 만들어진 시대와 지금의 사고방식 차이를 극복하는 일이고, 둘째는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여 고전을 읽을 수 있더라도 고전을 임상에 그대로 적용하여 현대에 되살리는 일이다. 둘 다 스승의 도움 없이 혼자 해내기는 어려운 작업임을 알았기에 원로 교수님들께 지도도 받고 대가라고 불리는 분들을 찾아가 도움도 받았지만, 불행히도 살아 있는 스승을 찾진 못하였고 《醫學入門》이라는 책을 스승 삼기로 하였다.
뼈를 갈아 넣는다는 말 그대로, 혼자 의학입문을 읽어내고 그에 적힌 그대로를 환자에게 적용하는 작업은 고된 길이었다. 두문불출하고 책과 임상에 파묻혀 지내길 10년을 하고서야 점차 行間의 뜻이 읽히고 적힌 대로 임상에 적용하는 길이 열렸다. 그러고 나서야 의학입문이 담고 있는 전통한의학의 요점이 우리가 매일 접하는 환자들의 病機를 파악하고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맞게 처방을 구성하는 데에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임을 알게 되었다.
한의사는 늘어도 전통한의학을 제대로 구사하는 분들은 점점 소수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同道를 구하고자 “임상을 위한 의학입문강의”를 연 지도 올해로 9년이 되었고, 수강자들께서 “의학입문 연구회”를 조직하여 매달 모이는 것도 7년째이다. 강의를 통해 가장 크게 성장한 사람
은 결국 다름 아닌 강사 본인이었다.
이 책은 9개월 과정의 강의를 녹취한 것을 토대로, 의학입문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보완해서 다시 쓴 글이다. 의학입문강의는 이론 위주의 전반부와, 수강생을 환자 삼아 진단하여 처방을 내고 복약시켜 경과를 보는 실습이 포함된 임상 위주의 후반부로 나뉘므로, 이 책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는 맥진실습과 처방실습을 제외한 강의의 전 과정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오직, 의학입문에 들어 있는 전통한의학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임상에 쉽게 쓸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일단 고전을 자신의 임상실제에 적용할 능력이 생긴다면 옛 대가들과 스스로 소통함으로써 한의학의 커다란 흐름에 합류할 수 있게 된다. 첫째 강의를 제외하고는 의학입문의 시각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였으니, 독자제현께서는 일단 일독하신 내용을 임상에 적용해보고 나서, 혹 私見에 빠진 곳이 보인다면 지적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일반 한의원에서 매일 접하는 환자들의 病機를 절실히 파악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사물탕, 사군자탕, 이진탕, 황련해독탕 등에 든 본초들을 활용하여 해당 환자에게 정확히 들어맞는 처방을 스스로 구성함에는 이 책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을 토대로, 옛 선배들이 했던 대로 목숨을 위협하는 질병을 다룰 수 있는 한의사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내 자신의 숙제이기도 하다.
학술적 엄밀함과 상세함을 위주로 책으로 만드는 것은 학술적으로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날이 갈수록 멀어져가는 전통한의학의 접근성을 오히려 떨어뜨릴 수도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오로지 오백 년 전에 쓰인 의학입문에 담긴 사고방식을 친근하게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그 속에 담긴 치법을 현대에 되살려 쓸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원문의 줄 바꿈, 띄어쓰기, 구두점, 해석, 맞춤법 등도 오로지 이해의 편리함만을 추구하여 관례에 구애받지 않고 번거로움을 최대한 피했다. 학술적 어투 대신, 비록 글이 투박해지더라도 일상적 반말투를 쓴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학술적 엄밀함이 모자라는 부분은 본인의 학문이 모자란 탓인데, 읽고 이해함에 문제가 안 되는 경우엔 보완하지 못하고 놓아둔 곳이 많다. 다만 첫째 강의만이라도 언젠가는 과학철학 등 관련분야를 더 연구하여 보완할 것을 기약한다.
이 책은 글씨의 색채로 구분되는 두 부분이 섞여 있다. 의학입문 원문과 해석 등의 본문은 모두 별색이고, 그에 대한 해설은 모두 검은색이다. 원문은 남산당출판사 《原本編註醫學入門》을 저본으로 했고, 원문해석은 남산당출판사 《國譯編註醫學入門》을 더러 참고했으며, 원문의 교정은 인용서를 직접 확인한 외에 법인문화사 《新對譯編註醫學入門》을 더러 참고했다. 원문을 교정한 곳에 대한 주석은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생략하였다. 책의 분량이 많으니 요약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중요한 부분을 따로 표시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는데, 한문으로 된 부분만이라도 여러 번 읽고 기억해둔다면 간략한 서머리는 될 것이되, 간혹 검은색 글씨인 해설에 꼭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는 경우에는 해당 부분을 고딕체로 썼다.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에는 무엇보다도 의학입문연구회 동료들의 격려가 주요했다. 특히 해석이 어려운 부분에 자료를 제공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현 연구회장 류제구 원장님,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강의녹취를 해주신 현인호 원장님, 교정에 도움을 주신 윤모로 원장님, 황정윤 원장님, 김상진 원장님, 김효경 원장님, 윤영진 원장님께 감사드리는 바이다.
--- pp.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