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로그인’을 했다. 기존의 ‘여리고 감수성 예민한 나’는 잠시 버리고 전투적이고 승부 근성 강한 ‘직장인 이혜린’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그리고 게임 미션을 하나하나 깨나가듯 일을 해치웠다. 그렇게 1라운드, 2라운드에 하나씩 돌입하는 데에 성공할 때마다 내 귀에선 유명한 전쟁 영화 OST라도 들리는 듯했다.
지겨운 일이면 어떻고, 좀 짜증 나는 일이면 어떤가. 우리는 아바타 계급 하나 올리겠답시고 하루 종일 도끼 하나 들고 괴물과 싸워온 세대 아닌가. 미션이 클리어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퇴근 후엔 로그아웃하고 잊어버리니까.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서 널브러진 ‘직장인 이혜린’은 내가 아닌, 내 아바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다 망쳐놓은 일은 내일 다시 로그인하면 어떻게든 해결되게 마련이니까.
상사한테 잔뜩 깨질 때에는, 악당과의 싸움에서 밀리고 있는 안젤리나 졸리를 상상했다. 단단히 물을 먹었을 때에는 좀비한테 쫓기고 있는 밀라 요보비치를 상상했다. 나는 여리고 소중한 내가 아니라, 그저 위기에 처한 게임 속 주인공인 거라고. -「실적의 압박」 중에서
내 이미지고 나발이고, 저 얄미운 여자를 골탕 먹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인가? 내가 회사에서 잘리는 한이 있어도 저 여자를 가만둘 수 없을 것 같나? 그러면 정반대로 행동하면 된다.
매번 그녀를 넘어서라. 특히 단 둘이 있을 때, 그녀가 하는 말마다 바로잡아주고, 그녀가 하는 일마다 같이 도전해라. 후배한테서 도전받는 것만큼 기분 나쁘고 견디기 힘든 일은 없다. 지금은 내가 널 선배로 모시지만, 몇 년 후면 상황이 달라질 것임을 늘 강조해라. 당신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하이킥을 할 만큼 경기를 하게 만들어라.
그녀의 아킬레스건도 건드려라. 다른 사람이 있을 땐 업무와 관계없는 일에도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을 보여라. 누군가 당신을 배려하면, “선배가 알면 어쩌죠?”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도 보여라. 당신의 어린 선배는 “나이도 어린 게, 후배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야?” 하는 평판에 직면할 것이다. 가끔 빨간 눈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장면이 목격되는 것도 괜찮다. 아직 이 사회는 나이 어린 여자가 권력을 갖고자 하는 데에 매우 부정적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여론은 당신 편일 것이다. 당신은 무조건 착한 역을 맡으면 된다. 더구나 사리 분별이 맹한 남자 직원이 많다면, 백발백중 당신이 이기는 게임이다. 그러면 어린 선배에게 당신은 불편한 후배가 된다. 어차피 이 게임의 핵심은 ‘누가 더 불편한가’이므로, 당신이 이기는 거다.
물론 뒷일은 책임 못 진다. 그녀도 나이만 어렸지, 당신보다 더 여우일 수 있으니까. 직장생활의 하루하루는 마일리지를 쌓는 것과 같기 때문에, 선배는 후발 주자가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눈치와 처세법을 쌓아놓고 있을 수도 있다. -「나보다 어린 상사」 중에서
사회 초년생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콘돔 없이 덤비는 남자친구다. 그 하룻밤이, 그동안 밤새가며 수능 공부하고, 코피 쏟아가며 A+ 받고, 대출 받아가며 스펙을 다져놓은 당신의 모든 것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다. 명심해야 한다. 여기는 유럽이 아니다. 여자 혼자 애 키워가며 일도 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한국은, 결혼만 해도 회사에 눈치가 보이는 곳이다.
‘에이, 이제 우리도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되지 않았겠어? 여자가 결혼한다고 사회생활을 못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낡아빠진 거지!’라고, 나도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 사회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나, 아직 회사에 제대로 자리도 못 잡은 신입에겐 더더욱. 대리, 팀장 달고도 출산휴가 다녀오면 자리가 밀려났을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는 판에, 신입이 당당하게 “배 속에 새 생명을 잉태해버렸네요. 애 좀 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할 만한 직장은 진짜 별로 없다. 뭐, 있기야 하겠지. 저 멀리 어딘가에……. -「사고 치면 끝장이다」 중에서
그럼에도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다른 데 있어. 정말이지, 너랑 대화하는 게 너무 힘들어. 네가 입만 열면 난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어제 기억나? 새파란 대딩들이 우글대는 대학가 고깃집에 앉아서 네가 말했잖아. 리포트가 너무 많아 힘들어죽겠다고.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일이라는 듯이!
결론부터 말하겠는데, 리포트를 쓰는 일 따위, 결코 힘든 일이 아니야. 넌 정말 세상 종말을 앞둔 것처럼 말했어. 이대로라면 학점이 엉망일 텐데, 교수님이 널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러고는 쭉 읊어댔지. 개론, 연구, 심화 등으로 끝나는 강의 이름들. 그리고, 넌 정말 ‘내 인생을 바꾼 영화’ 리포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것처럼 말했어!
내가 돼지갈비 양념이 뚝뚝 흐르는 집게를 네 입에 쑤셔 박지 않은 이유는, 그래도 널 사랑하기 때문이야. 학점? 리포트? 내 인생을 바꾼 영화? 똑똑히 말해둘게. 그딴 것들은 앞으로 네가 마주해야 할 장애물에 비하면 코끼리 비스킷도 안 돼. 난 어제 회사에서 잘릴 뻔했거든? 부려먹을 때는 깨알같이 부려먹더니, 정규 채용은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대. 그 잘나가던 회사가 내 인턴 기간이 다 끝날 때가 되니까 어찌나 어려워졌다는지! -「연하남,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중에서
한밤중에 불쑥 찾아온 남자가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것은 민낯으로 나가도 상큼한 20대 초반 때 얘기다. 지금 이 나이에 자다가 일어나 그대로 나가면, 상대는 이별 통보로 받아들인다. 사실 그 야밤에 비비크림 바르고, 덜 구겨지고 몸매 라인도 살짝 잡아주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나가서는 달랑 5분 얼굴 보고 돌아오는 거, 진짜 피곤하다. 클렌징 오일 바르고 다시 세수를 하고 나면, 젠장, 아이크림부터 넥크림까지 다시 발라야 하는데! 퇴근하고 돌아와서 씻는 것도 귀찮아죽을 판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다.
물론 내게도, 사랑이란,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세상이 그 남자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거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거, 얼마 못 가더란 말씀.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그 남자는 퇴근시간이 나보다 한 시간 가량 늦었다. 거기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데에는 30분이 넘게 걸렸다. 내가 미리 그놈 근처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놈 회사 근처엔 당최 뭐 먹을 게 없었다. 그래서 난 평일에 그를 만날 때마다 약 두 시간 동안 주린 배를 잡고 그를 기다려야 했다. 믿을 수 있나? 나는 그를 기다리며 1분 1초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사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직장인의 연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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