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우리는 춤이 사라져 버린 후 과거의 춤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에 집착해 왔으며, 이런 노력은 대개 글로 쓰여진 안무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분명 이러한 노력은 춤이 소멸되지 않을 수 있게, 그 존재와 전승 방식을 강화해 준 뛰어난 학문적 성취들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우리는 춤이 역사로 남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춤이 지닌 결함을 이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특성, 그 때문에 종종 불투명한 미적 현실을 가리키는 시적, 철학적 은유에 포획되고 말았던 바로 그 특성 말이다.
--- p.31, 보야나 스베이지,「상상의 예술에 대한 믿음」 중에서
무의미한 직업은 예술가의 노동을 떠올리게 한다. 두 유형의 노동 모두 가치를 생산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르게 가치가 매겨진다. 동시에, 각각의 노동 유형은 현재 생산 시스템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다. 무의미한 직업이 현재 자본주의의 발전하에서 실제로 더 적게 일해도 된다는 사실을 감추는 역할을 맡고 있다면, 예술 노동은 이 사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술 노동은 통제의 대상이 되고 게으름과 분별없는 소비라고 비판받는 것이다.
--- p.79, 보야나 쿤스트, 「실천 속에서: 무용가의 노동하는 몸에 관한 몇 가지 사유」 중에서
무용가의 몸은 계속해서 연습 중이라는 차원에서, 불가능한 일을 하는 불가능한 신체다. 그것은 상품화되지 않은 쾌락과 생산성의 원천일 수 있으며, 일상과의 뒤얽힘 속에서, 언제나 다른 것과 관계된 상황 속에서 조직된다.
--- p.94, 보야나 쿤스트, 「실천 속에서: 무용가의 노동하는 몸에 관한 몇 가지 사유」 중에서
역사를 혼란시키는 잔존 이미지의 성질 때문에 수백 년 된 예술 작품, 주제, 이미지는 (1785년에 쓰인 포르노그래피 문학작품 소돔 120일처럼) 탈시간적으로 분출한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예술가들이 참고하는 데 그치는 역사적 선행 사건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들은 잔존 이미지가 사후의 삶에서 갖는 정동적, 정치적, 미적 힘 덕분에 예술가들이 의지할 수 있는 완전히 동시대적인 작품이 된다. 잔존 이미지의 시의적인 동시대성은 바로 끈질긴 탈시간성에서 나온다.
--- p.138, 안드레 레페키, 「코레오그래피와 포르노그래피: 탈시간적 사드, 동시대의 춤」 중에서
퍼포먼스는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도발적일 수 있지만, 그 초과와 과잉은 언제나 가능한 것의 영역에 머무릅니다. 진짜로 과도하고 풍부한 것은 춤입니다. 아무리 형식적인 춤일지라도요. 가능한 것을 초과할 가능성, 넘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퍼포먼스는, 아무리 과도할지라도, 확률에, 따라서 측정 가능성에 국한된 실천이지만, 춤은 우발적인 초과, 측정할 수 있는 것 너머의 초과, 이성, 합리성 같은 빌어먹을 것들의 너머에 있는 초과를 실천합니다.
--- p.183, 마텐 스팽베르크, 「포스트댄스, 그 변론」 중에서
잠재성은 그 무언가가 무언가로 현실화되어 변화하기 바로 직전에 머무는 곳입니다. 영구히 그래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머물 곳이죠. (…) 가능성은 상상만 이용하면 만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잠재성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그 발생 가능성만을 만들 수 있죠. 잠재성과 관련해서 보장된 것, 확실한 것은 그 무엇도 없으며, 계산될 수도 없습니다. 잠재성은 확률이 아니라 우연의 문제입니다. 필요한 유일한 것은, 무언가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 p.186, 마텐 스팽베르크, 「포스트댄스, 그 변론」 중에서
춤은 지금 안무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번의 이혼이 아니라, 두 번의 이혼입니다. 우리는 안무를 춤과 이혼시켜야 하는 동시에, 춤을 안무와 이혼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혼이 진행되고 있다고 해서 사랑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주술을 깨서, 안무가 춤의 어머니 말고도 다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할 뿐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안무와 춤은 서로 별개의 역량이고, 이제는 각각, 그리고 함께 빛나야 할 때입니다.
--- p.196~197, 마텐 스팽베르크, 「포스트댄스, 그 변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