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는 한 인간이 지닌 슬픔은 영원히 가시지 않으며 그것은 땅속에 들어갈 때라야 잊히는 법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슬픔은 참거나 잊히는 것이지, 탕감되거나 저절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인간은 어느 곳에 올 때 그가 지닌 모든 것과 함께 오지만,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씨앗 하나로부터 다시 새로운 뿌리가 내리는 법이다. 그게 단절과 연결의 의미일 거라고 그는 그때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스무 살 무렵이 되자, 그는 자기 존재에 대해 무엇보다 깊게 고민하고 숙고했다. 그러다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이 카리브 해로 흘러들어온 것 중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살아난 게 있던가?’ 이 순간, 그는 시와 음악이 그의 발밑으로부터 싹이 돋아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깨달음이었고, 그의 영혼에 닻이 내려지는 것 같은 강한 확신감이었다.
--- p.59
그들이 사귄 지 1년가량 되었을 때, 그녀는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그때조차 그는 코앗사 코알코스 강에 연꽃 같은 풀 하시아토가 떠 있을 때 그 꽃을 바라보던 갈색 눈의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전혀 관심 두지 않았다. 비가 오면 꽃잎들이 떠내려갈 때 소녀가 왜 강의 끝까지 내달리며 그 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려 했는지도. 이건 분명히 그가 간과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어떤 점에선 한계였음에 틀림없다. 여자의 과거를 알고자 하지 않는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니까. 그는 한참 뒤에야 아나가 얘기했던 그 강이 흐르던 지역을 또렷이 더듬어 볼 수 있었다.
--- p.66
경비원이 술을 마시고 잠든 한밤중에 아버지는 유리병에 물을 채워서는 몰래 그 마른 우물 속으로 끈을 드리워 주었지. 아버지의 행동은 들키기만 하면 매질 받을 만한 거였지만, 그래도 당신은 용기내서 그를 도왔지. 그러곤 아버지는 다시 조용히 돌아와 누우셨다. 그 밤의 스산한 나무 그림자가 그의 머리맡에까지 와 닿았던 풍경도, 그 때문에 무서워 넝마 같은 모포 속에서 몸을 떨던 기억도 났다. 다음날까지도 농장에선 우물에 처박힌 사내가 다소나마 갈증을 해소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몰랐다. 그 남자는 나중에라도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그랬든, 안 그랬든 어떤가. 우리는 혁명 때 이들처럼 하찮을 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생사를 건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단순히 혁명군에게 물 한 잔을 줬다는 이유로 내통 혐의로 찍혀 정부군에게 붙잡혀 뒤통수에 총을 맞아 죽은 농부들도 있었으니까. 그들은 정말 안 됐지. 이 쿠바에서 가장 불쌍한 계급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이야말로 내란 중 가장 극심하게 당했으니까.
--- p.85
“너는 누구지? 치노인가?” “꼬레아노.” 그가 대답했다. “꼬레아노? 꼬레아노가 누구지? 아무튼, 학생이라고 했나? 음악을 한다고?” 하고 사내는 나름 관심을 갖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루는 악기는?” “기타.” 사내는 다시 그를 흘금 살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오래 악기를 다뤘나?” 그는 열네 살 무렵부터 기타를 쳤노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농장주의 아들이 여름에 기타를 가져와서 치다가 망가뜨려 버린 것을 주워서 줄을 매어 치기 시작했으니까. 지금 그의 방에 있는 게 바로 그거였다. “그래? 그럼, 아르모니코(트레스와 스페인 기타를 결합한 악기.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콤파이 세군도는 이 기타로 나일론 줄과 스틸 줄 소리를 동시에 표현하는 독창성 있는 연주를 했다)와 거의 같겠군. 우리 중엔 아르모니코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지. 대단하지.”
--- p.109~110
체(Che)가 강론하는 동안, 바르부도스들은 각자 앉거나 서서, 또는 소총을 가슴팍에 껴안거나 어깨 위로 멘 채로 다들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숲 안쪽에도 땅이나 나무둥치에 앉아서 듣고 있는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햇볕이 내리쪼이는 망글리 나무숲 아래에는 체의 나직하면서도 열정적인 목소리와 가끔 지나가다가 우는 새소리를 제외하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너무나 진지한 나머지 분위기에 압도될 지경이었다. 그는 리앙과 확신에 찬 눈빛을 주고받으며 눈과 귀를 더 활짝 열었다. 지휘관의 연설은 계속되었다.
--- p.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