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도취 문제가 없는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고, 욕구의 유무에 따라 흔들리며, 제 스스로 그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키거나 변화시키거나 미룰 줄 안다. 반대로 자아도취 장애가 있는 사람은 진정한 충만을 꿈꾸며 늘 불안, 긴장, 불만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 충만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는데도 말이다. 잃어버린 행복을 추구하는 성격은 모험가, 개척자, 탐험가를 만들어내고 유명한 인물을 빚어낸다. 하지만 일차적 자아가 아닌 이차적 ‘나’가 이루어낸 특별한 성과를 그들 스스로는 남다른 노력이라고 평가하지 못한다. 힘겹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 노력을 자신이 이룬 종종 의문스럽기도 하고 파괴적이기도 한 결과와 연관시킬 줄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발전’은 예상하지도, 또 의도하지도 않은 새로운 문제와 장애를 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받지 못한 자아도취 장애자들의 그늘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나를 사랑한다, 세상에서 가장」
험담이란 개인적으로 그 ‘피해자’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때 가장 짜릿하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남을 폄하하고 주어진 여건을 한탄하는지 아는가? 이것은 자신의 나르시스적 결핍을 항구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일상의 소통 행위다. 남이 ‘나쁘면’ 자신은 저절로 상대적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된다. 이것은 자존감이 행하는 필연적 조절 작용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곧장 해방감을 줄 수는 없다. 자신이 겪은 악은 오로지 파괴적으로만 발산되고 전달된다. 만약 그런 분출구를 전혀 찾지 못하거나 도덕적 이유에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누적된 영향을 자신에게로 돌릴 위험이 매우 크다. 예를 들면 심리적 또는 심신상관적 질병의 형태로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허세병에 빠진 그 남자」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존감에 대한 회의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제 몸값을 올린다. 부모의 매정함은 인식하지 못한 채 오히려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치명적인 오판을 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방법과 수단을 강구한다. 거기서 비롯된 노력과 수고는 대단한 업적과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단 하나, 사랑으로는 이어지지 못한다. 사랑이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기껏해야 인정과 존경을 얻을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오로지 남에게서 받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애정 결핍 탓이라고 느끼는 것은 생존을 가능케 하기 위해 정신이 행하는 비극적이면서도 자비로운 보호 기능의 하나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존재임을 느끼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다. 부당하고, 환영받지 못하고,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승인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한 사람을 살아남게 한다.--- 「노력만 해서는 사랑을 얻지 못한다」
자아도취 장애가 있는 사람은 성관계를 할 때 파트너를 자아대상으로 여긴다. 잘난 자아형 자아도취자는 당연히 성관계에서도 찬탄받기를 원한다. 이 경우 성적 능력만이 중요할 뿐 사랑의 감정은 거의 배제된다. 반면 못난 자아형 자아도취자는 파트너에게 잘 보이려 애쓰며, 상대의 욕구 충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성 또는 엄마에게 봉사하는 유형의 남성은 실제로 자신이 파트너를 절정감에 오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제대로 된 노력과 능수능란한 테크닉 그리고 충분할 정도의 지속 시간이라고 여기며, 심지어 성기의 크기만이 가장 중요하다고도 생각한다. 이와 결부된 수치심의 위험성은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다. “난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야!”, “난 만족시킬 자신이 없어!”, “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난 제대로 하지도 못해!”, “발기에 문제가 있어!”, “시작했다가 너무 빨리 끝나버려!” 등이 그런 표현이다.--- 「사랑은 없이 행위만 남은 성관계」
사회주의는 인간 스스로가 받을 수 있는 것 이상을 가지려 했기 때문에 몰락했고, 자본주의는 인간 스스로가 번 것 이상을 소비하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소득’은 현실을 척도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합리한 나르시스적인 결핍을 지향했다. 빚에 의존한 인생은 현실을 무시하고 망상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불러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양 진영은 서로 결탁하여, 전쟁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책임 추궁을 집단적으로 방어하는 일에 묶여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까지 ‘과거 극복’이라는 근본적인 잘못이 해소되지 않은 것이다. 전쟁은 주로 정치적 힘의 논리로, 그리고 경제적 관점으로 해석된다. 기본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엄청난 결과를 사람들은 고리타분한 기념식이나 ‘전쟁 없는 세상’을 부르짖는 맹세 그리고 기껏해야 형식적인 책임 고백과 함께 접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잠재적 파괴력은 거의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자아도취적 절박성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해당자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자마자 대중 현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
---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