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책 실현과 관련하여 여론의 공감대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세력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는 주어진 사건들을 냉철히 분석하고 그로부터 도출된 판단에 따라 실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펼친 현실정치(realpolitik)의 핵심적 내용이라 하겠다. 현실정치가로서의 이러한 자세는, 그가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1848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견지되었던 것으로, 그의 정책에 대한 불만 세력의 결집 및 활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p.4
국왕과 의회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가운데 1862년 9월 24일 비스마르크는 임시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산위원회에서 국가 예산 중 군사비 항목이 삭감된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즉, 그는 1862년 9월 30일 의회에서 “독일권이 주목하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권력이다. (중략) 오늘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것이 1848년과 1849년의 잘못이다--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와 철(blut und eisen)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라는 것을 언급했던 것이다. 하원의 반대로 차기 연도 예산이 확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상하 양원의 불일치로 예산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헌법 규정이 없음을 파악했다. 따라서 그는 하루라도 국가 통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점이론’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프로이센이 영국이 아니기 때문에 베를린 정부는 런던 정부처럼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초래될 경우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후 그는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의회의 예산권은 무력화되었고 군제 개혁을 둘러싼 분쟁은 헌법투쟁으로 비화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관료와 군대를 장악하고 예산 불승인에도 불구하고 조세 징수를 감행했다. 이에 독일 진보당은 납세 거부를 국민들에게 호소했지만 그러한 시도를 펼친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탄압은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카를스바트의 결의를 능가하는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것에 대해 저항할 사회 세력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 p.34
그러나 1873년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경제 불황은 주가의 대폭락과 수많은 기업의 도산 및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야기했다. 통일 과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국민자유당의 지원하에 자유주의적 제 개혁을 시행함으로써 독일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구가했지만 장기간의 공황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은 이제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됨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을 대신하여 보수당과 중앙당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까지 견지한 경제 정책의 근간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즉, 그는 보호관세 제도를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부담금 역시 증액시켰던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자신과 국민자유당 사이의 균열을 가져왔지만 보수당과 중앙당과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점차 제국의 새로운 적으로 부상하고 있던 사회주의 추종 세력과의 대립에서 우위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