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火病)은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문화결합 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우리 전통 문학작품에 형상화된 화병의 사례와 화병에 대한 역사 기록, 사회구조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 화병의 사례 등을 다양하게 수집하여 화병의 병리적 증상과 그 원인을 들여다본다는 취지에서 기획된 교양서이다. 화병은 의학 용어이기 이전에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친연성 있는 표현으로, 한국인의 한의 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억울함과 분노라는 감정과 관련이 있고, 오래 참는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병이어서 인내를 큰 덕목으로 여기는 한국 문화에서 더욱 보편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책을 출발점으로 하여 앞으로 문학은 물론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에서 화병을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p.13, 「총론: 화병을 ‘이야기’하다」 중에서
‘사랑의 화신(化身)’이 ‘저주의 화신(火神)’이 되어 버려 주변의 일상을 잿더미로 만드는 일은 오늘날 오랜 짝사랑 끝에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속) 연인에 대한 화병(火病)으로 자신을 해치고 자신이 오롯이 아꼈던 그 사람과 가족을 해치고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옮기는 어리석은 스토커들에 대한 경고는 아니었을까. ...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오래 전부터 몸속에 깊이 드는 골병과 함께 마음속에 깊이 병드는 마음, 즉 화병(火病)을 미움보다는 안타까움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음을 알 수가 있다.
--- p.13, 「심화(心火)」 중에서
정조의 화병은 수원 화성 축조 이후부터 그 증세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자신의 개혁을 완성하기 직전의 상황이었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수원화성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과로로 인해 몸의 피로감이 심하여졌고, 정치적 갈등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영조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 반역으로 치부하겠다고 하였던 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가문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부담감, 정치적으로 자기 신념을 공격당하는 데서 오는 상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화병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 중기 두 번의 전쟁을 겪은 선조와 조선 후기 부흥기의 출발점으로 인식되는 숙종으로부터 경종, 영조, 사도세자와 정조에 이르기까지 화병을 앓았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 p.13, 「기록으로 남은 화병」 중에서
우리 역사에서도 선조(조선 14대 임금)에서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에까지 이어지는 선조 가계의 다양한 울화병(鬱火病)의 상황들은 저마다의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며 임진왜란 이후의 우리 근대사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는 도화선(導火線 triger)이 될 것이다.
--- p.13, 「유전인가 직업병인가」 중에서
『성현공숙렬기』의 유연, 『완월회맹연』의 소교완, 이 두 사람은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질병에 걸린다. 이들이 긍정적 인물이든 부정적 인물이든 간에, 그들의 몸에 병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억울함’의 누적과 이로 인한 분노이다. 그런데 이들의 주변에서 이러한 마음 상태를 알아주거나 하소연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위로와 공감을 해주는 인물을 찾을 수가 없다. 전통사회에서 개인은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억울한 상황을 참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조차 표출하지 않아야 했다. 문제는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억울함이 내면에 쌓이게 되고 이것이 신체에 병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누적된 억울함이 끓어오르는 것이 ‘화’일 것이며, 오랜 시간 바깥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화는 신체를 망가뜨리거나 비정상적으로 폭발하고 만다. 앞에서 살펴본 국문 장편소설의 두 중심인물은 가부장제 하에서 좌절과 분노를 느낀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병에 걸린 두 인물을 통해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내재된 질병적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
--- p.13, 「대가족 제도의 희생양」 중에서
자식과 며느리, 사위 등으로 인해 화병을 얻어 죽음에까지 이르는 조선 시대의 부모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사회화되었고 조선 시대에 어떠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집안을 넘어 국가의 기강의 문제로까지 연결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오늘날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p.13, 「자식이 웬수」 중에서
장현주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격한 분노의 감정을 갖게 되고, 한때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기에 이른다. 장현주의 분노는 즉각적으로 외부로 발산되어 주변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괴롭힌다. 하지만 그녀가 극한으로 치닫지 않고 분노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인 상황을 받아들였던 데 있다. 자신의 화(火)의 원인을 직시하기 위해, 인생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되짚어 가는 과정을 온전히 겪어냈기 때문이다. … 가슴속에서 화가 일어났던 초기에는 화를 바깥으로 분출하는데 급급했지만, 극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 p.13, 「아내의 도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