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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내가 괄호 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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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137이동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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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0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127*203*20mm
ISBN13 9791158964900
ISBN10 115896490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소실점 가까이 안도의 세계가 보인다 세계는 점점 커지다가 갑자기 입을 벌린다 시커먼 구멍, 일단 통과해야 한다 그 속이 비밀이든 수렁이든

영원도 낙원도 보이지 않는다 일정한 간격으로 켜져 있는 위성만 보인다 궤도를 따라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과연 출구는 있는 걸까 자동차는 멈출 수 없다

졸지 마! 잠들지 마! 대신 새소리를 들려줄게, 얼굴 없는 새가 고래고래 운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조심해! 꿈꾸지 말란 말야! 사이렌이 비명을 지른다 나는 무지개를 놓친다 검푸른 보라색이 천장에서 어른거린다 물고기가 길을 잃고 허공에서 돌아다닌다

타이어들이 맹렬히 진동한다 세계는 끝없는 직진이다 백두대간을 지나 지하 550미터 지점을 달리고 있다 문득 숨통이 조여온다 천장 끝에 매달린 환풍기가 금방 떨어질 것만 같다 거대한 두 개의 회전판, 공회전이다

초록별을 따라간다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것 같다 출구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거기 또 다른 아가리가 도사리고 있다
---「터널」중에서

새가 나뭇가지에 출렁 앉을 때
일몰의 눈썹 사이에서 태어난다
나는 새와 나무의 증거

나무는 잎사귀로 말하고 바람은 가지로 노래한다
새가 먼저 문을 연다
우듬지가 땅에서 가장 멀리 달아나도록 하늘을 밀쳐내고
꽃빛의 음률을 목젖에 넣어둘 때

나뭇잎은 파도치고 지층 아래 켜켜이 쌓이고
심폐 가득 자란 새소리가 집을 부순다
벽이 나무 쪽으로 넘어진다
나무는 땅 밑으로 도망치고
파동 치는 슬픔의 푸른 근육들은 자란다

쉬지 않고 매 맞는 당신
누구?

새들은 왜 자꾸 별을 물어오나
기지개를 켜고 뿌리를 뒤트나

속도가 다른 질문들이 출렁인다
당신은 아주 잘생긴 지진
나는 달린다 당신의 어깨에서 팔뚝으로 발끝으로
체위를 바꾸려고

나는 어디에나 있다
친절도 악의도 없이
내가 낳은 행성처럼 몸을 뒤집는
---「내 이름은 지진」중에서

당신은 황금빛이거나 흙빛이거나 무지개이거나 어두운 갈색이거나 언제든 병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리는

잘린 목처럼 뚜껑이 나뒹굴기를 주둥이가 열려 온몸이 쏟아지기를 병 밑에서 그르렁거리는 세상이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는

숨 막히는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자객에게 순식간에 목이 따지기를 기다리는 당신은 퍽, 하는 천지개벽을 기다리는 당신은, 그것이 거품일지라도

당신은 어디서 왔을까 두줄보리알갱이에서? 보리밭 허공을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종달새 울음에서? 멈추지 않는 바람을 찢는 매미 울음에서? 사선으로 베어진 보리줄기 그 밑동에서?

당신은 거품 속에서 꽃잎으로 태어나길, 붉은 갈증의 입술에 달라붙기를, 갈라터진 어느 입술을 지나 메마른 입천장을 지나 길고 어두운 구멍을 꿈꾸는
---「맥주」중에서

꽃그늘 속에 여자가 누워 있다
아까는 그렇게나 많이 웃었는데 지금은 입가 주름이 멈춰
있다
주름은 아직 말랑말랑하다
치즈처럼 늘어날 것 같다

웃음이 막 지나간 곳, 누군가의 체취가 묻어 있는 곳, 여자는 빨간 운동화를 벗어놓고 마스크를 내려놓고, 환한 스카프에

목 졸린 듯
죽은 듯
까무러친 듯

흰나비와 노랑꽃잎 사이를 지나 벌들이 꽃술을 빠는 사이를 지나 바람에 꽃 대궁이 쓰러지는 사이를 지나 자꾸 하늘을 벗어나는 구름과 붉은 대낮과 유월을 지나 어디론가 바삐 가는 개미떼를 지나

여자가 깨어나고 있다

빨간색 운동화를 찾아 끈을 매려는 듯 스카프를 고쳐 매려는 듯 머리칼을 쓸어 올려 눈꺼풀을 열려는 듯
---「한강 하구로부터 90킬로미터 지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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